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은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요새화하였고,
제주도에는 5만 8,000여 명의 일본군 대병력이 주둔하였다.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군은 미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제주도 남로당원들이 일본군이 남겨놓고 간 소총과 수류탄, 검 등으로 무장하고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경찰 및 우익 청년단체를 대상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남로당의 거센 테러 활동으로 제주도는 통제 불능 상황으로 치달았다.
1941.12.08. 일본군이 항공모함 6척과 함재기 414대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다
1945.03.10. 미군은 B-29 폭격기 344대가 도쿄를 공습하여 10만 여명이 사망하다
1945.03.20. 일본군은 본토 수호를 위한 '결호 작전'을 수립하고 결7호 작전에 따라 제주도는 거대한 군사 요새가 되다
1945.04.01. 미군이 일본 오키나와에 상륙하다
1945.05.07. 일본군에 의해 노약자와 부녀자를 실은 배가 미 공군기의 공격으로 침몰하다
1945.06.23. 오키나와의 일본군수비대가 전멸하다, 군인군속 2만 8천 명, 전투참가자 5만 5천 명 및 주민 10만 명이 희생
1945.08.06.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시키(08.09)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다
1945.08.15. 일본 쇼와 천황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다
1945.08.25.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미군 제 7보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다
1945.09.07. 미국 극동 군사령부는 대한민국의 군정을 선언하다
1945.09.08. 미군 제24군단은 조선의 일본군 사령관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다
1945.09.28. 미군이 LST함 편으로 제주도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다
1945.10.23. 무장 해제한 일본군은 LST함 5척으로 10회에 나누어 일본으로 철수하다
1945.11.09. 미군정 제59군정 1개 중대가 제주도에 상륙하다
1946.08.01. 제주도는 행정조직이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하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9월 총파업 투쟁을 벌였고, 연이어 10월에는 대구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공산당 등 3개의 사회주의 정당을 통합하여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결성되고 남로당 중앙당은 대중 투쟁의 일환으로 1947년 3.1기념행사를 대대적인 개최를 각 지방단체에 지시하였다.
1946.09.23. 9월 총파업, 조선공산당이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일으키다, 소련군정은 200만엔을 지원하다
1946.10.01. 10월 대구폭동, 박헌영 주도 9월 총파업에 연이어 폭동을 일으키다, 사망자 1천여 명(경찰관 200여 명), 행불 3천6백여 명, 부상 2만 6천여 명, 소련군정 300만엔을 지원하다
1946.11.16. 제주도 모슬포에 병력 800여 명의 국방경비대 제9연대를 창설하다
1946.11.23. 소련의 스탈린은 남조선 3당 합당을 지시하고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다
1946.11.23. 남로당 중앙당은 1947년 3.1기념행사를 대대적 개최를 각 지방단체에 지시하다
1946.12. 조선공산당 제주도당은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으로 이름을 바꾸다
1946.12.07. 소련 군정이 혁명자금(122만 루블)을 박헌영에게 보내라고 지시하다
1947.01.12.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을 창설하고, 제주도 부녀동맹(01.15) 결성하여 읍⋅면⋅리 단위까지 조직을 갖추다
1947.02.16. 남로당 제주도당은 3.1 행사지침을 산하 단체와 읍⋅면 직장 세포책에게 시달하고 행사는 민전이 주관하도록 하다
1947.02.23. 남로당제주도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하다
3.1절 행사장에 남로당이 동원한 군중이 모이고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의 말 가랑이 밑으로 말려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시위군중은 돌멩이를 던지면 경찰을 뒤쫓았고 기마경찰은 경찰서로 피신했다.
경찰서로 몰려간 시위군중을 경비 경찰은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였다.
경무부는 조사를 통해 불가피하게 발포했다는 해명에 항의하여 민관이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1947.03.01. 11시 행사장인 제주읍 북국민학교에 남로당이 동원한 군중이 모이고, 인민위원회의 적극 동원으로 3만 명의 도민이 참석하다
1947.03.01. 14시 미군정과 경찰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리로 나와 시위행진을 벌이다
1947.03.01. 3.1절 기념대회에서 경찰 발포로 주민 6명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다
1947.03.03.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가 취임하다
1947.03.05. 남로당은 '제주도 3.1사건 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투쟁위원회'를 결성하다
1947.03.08. 3.1사건 조사를 위해 미군정청 합동조사단이 제주도에 방문하다
1947.03.10. 3.1사건 항의하여 민관이 총파업에 돌입하다, 전체 직장 95%인 166개 기관과 단체의 4만여 명이 참가하다
1947.03.14.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도 파업진상 조사차 내도하여 포고문을 발표하다
1947.03.15. 전남⋅전북 경찰 222명이 제주도에 도착하고 파업주모자 검거 명령이 내려지다
1947.03.22. 3.22 총파업, 남로당 예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전국적으로 24시간 총파업을 전개하다
1947.03.28. 경무부는 "파업선동자 전국에서2,176명 검거, 제주는 230명"이라고 발표하다
1947.04.02. 제주도 군정장관에 베로스 중령이 부임하고 제주도지사에 전북출신 유해진 발령나다(04.10)
1947.05.23. 3.1사건 관련 328명 공판 완결, 체형 52명, 집행유예 52명, 벌금 56명, 나머지는 불기소 처분하다
1947.05.26. 피의자 고문사건으로 한림지서장·차석 등 경찰관 2명을 구속하다
1947.06.06. 남로당은 북제주군 세화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 2명을 사살하다
1947.11.02.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를 결성하다
1947.12.03. 베로스 중령 후임으로 맨스필드 중령이 제주도 군정장관으로 부임하다
남로당은 유엔위원단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파업과 폭동을 일으켰고, 경무부는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1948년 2월말에 남로당 제주도당 임원들의 ‘신촌회의’에서 강·온파의 논쟁 끝에 12대 7로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제주읍·각면에 인민유격대 100명과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등 편성,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등 그 외는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1948.01.22. 경찰은 새벽 3시에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 급습하여 106명 검거하고 폭동지령문 압수하다, "2월 중순 3월 15일사이 제주도 전역 무장폭동,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
1948.02.07. 남로당이 유엔위원단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파업과 폭동으로 100여 명이 사망하고 8500여명이 투옥되다
1948.02.08. 안덕면 사계리 청년들이 마을에서 술마시던 경찰관 2명을 집단구타하고, 저지지서가 피습당하다
1948.02.11. 2.7사건 여파로 제주에서 방화 1건, 테러 9건, 시위 19건이 발생하다
1948.02.25. 남로당 제주도당이 조직개편으로 위원장 강규찬, 부위원장 김용환, 군사부장 김달삼을 임명하다
1948.03.10. 성산면 관내 청년 66명이 남로당을 탈퇴해 대동청년단에 가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다
1948.03.15.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 무장투쟁 결행을 최종 결정하다
1948.03.28. 남로당 제주도당이 회합을 갖고 무장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결정하다
남로당 김달삼 등이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 등을 내세우며 무장폭동을 일으킨다.
무장대가 선거사무소를 습격하고 마을 선관위원장을 살해하는 등 제주도 2개 선거구를 무효로 만든다.
4.3폭동 주동자 김달삼 등 6명은 북한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1948.04.03.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다(~1957.04.02)
1948.04.03.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 명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를 습격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이 사망하다
1948.04.05. 미군정은 약100명의 전남경찰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을 봉쇄하다
1948.04.18.~05.05. 무장대가 선거사무소를 습격해 관련 서류 탈취하고 투표소를 습격·방화하고 선관위원장을 살해하다
1948.04.27. 경비대 5연대와 미20연대 정찰대를 동원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다
1948.05.01. 서북청년회 등 극우청년 30여 명이 오라리 연미마을에 들어와 10여 채의 집에 방화하다, 전날 무장대에 살해된 여인의 장래식에 참석한 청년단원들이 좌파 활동한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불을 지르다
1948.05.10. 5.10 선거 실시, 제주도 북제주군 갑·을 2개 선거구는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무효되다
1948.05.11.~19. 무장대, 제주읍 도두리에서 마을 선거관리위원장, 대동청년단장, 또는 그들의 가족들을 납치해 살해하다
1948.05.19. 철도경찰 350명과 제6관구 및 제8관구 경찰관100명 등 총 450명이 제주도로 출발하다
1948.05.20. 제9연대 하사관 11명 등 경비대원 41명이 실탄 5600발 휴대하고 모슬포 부대에서 탈영하다
1948.05.30.~06.02. 제11연대 진압작전으로 3600여 명 연행하다. 인민유격대 보급창에는 일본군이 무장해제 시 미군 측에 반납하지 않고 동국 속에 버려둔 많은 탄약과 총기류를 회수하다
1948.06.18.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숙소에서 부하에 의해 피살되다, 범인 4명은 군법에 따라 총살형에 처해지다
1948.07.10. 철도경찰 100명이 제주도에 파견되고, 7월 19일에는 200명이 제주도에 파견되다
1948.07.20. 이승만은 국회에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1948.07.21. 부산에 있던 3여단의 2개 대대가 제주도로 이동해 9연대에 배속되다
1948.08.15.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1948.08.21.~08.26. 김달삼은 황해도 해주에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다
군과 경찰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집단 월북하는 등 전국적인 사회혼란을 초래하였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반국가 행위를 처벌하였고, 군수뇌부는 전군을 대상으로 좌익분자를 색출하였다.
김달삼의 뒤를 이은 이덕구는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국군과 전면전을 벌였다.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군대를 공격하였고, 토벌대와 전투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48.10.08.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철수 연기를 요구하다
1948.10.11.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설치하다
1948.10.17. 제주 해안에서 5Km 이상 중간산간 지역을 통행금지하고 위반시 총살 포고문 발표하다
1948.10.18. 제주해안을 봉쇄하고 여수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제주도에 증파를 명령하다
1948.10.19~10.27 여수순천반란 사건, 여수 국군 제14연대에서 2천여명이 반란으로 우익인사와 가족들 처형하다
1948.10.23. 무장대는 제주읍 삼양지서와 조천면 관내 조천지서·함덕지서를 일제히 공격하다
1948.10.24. 무장대 이덕구 명의로 정부에 선전포고하고 국군과 전면전을 벌이다
1948.10.28. 제 9연대 장병 100명 가량이 남로당 프락치로서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연행하다
1948.10.29. 제 9연대 애월면 장전리 회합중인 공산폭도를 급습하여 135명을 사살하다
1948.11.01. 무장대와 내통한 혐의로 일부 경찰이 체포되는 소위 '경찰 프락치 사건' 발생하다
1948.11.02. 대구 6연대 반란을 일으키고, 춘천 2개 대대는 집단 월북하고, 공군 조종사 2명이 비행기를 몰고 월북하다
1948.11.07. 토벌대는 구좌면 행원리 가옥20여 채를 방화하고 주민 10여 명을 총살하다
1948.11.13. 토벌대는 약 4개월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하고 주민들을 집단총살하다
1948.11.14. 인민유격대 제1군단 약 180명을 강원도 양양으로부터 오대산지구에 침투하여 남하하다가 대부분 소탕되다
1948.11.17.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다
1948.11.28. 무장대,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를 집중공격해 주민들을 집단살해하고 가옥에 방화하다
1948.12.01.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다, 1949년에 11만 명 이상 체포하다
1948.12.03. 무장대, 구좌면 세화리를 습격해 주민 50명 가량을 살해하고 40가호 150채에 방화하다
1948.12.03. 송요찬 9연대장은 11.20~11.27 동안 폭도 576명 사살하고 122명 생포했다고 미군군사고문단에 보고하다
1948.12.13. 서북청년회 단원 620명을 정식 경찰로 임용하다
1948.12.19. 서북청년회 단원 250명 제주 도착하고 이중 25명은 경찰, 225명은 군인이 되다
1948.12.19. 무장대 신엄리 공격, 9연대 7중대 1개 분대 전원 전사, 11중대 18명 전사, 주민 10명. 경찰 1명 피살되다
1948.12.21. 토벌대는 조천면 관내 주민 150명을 냇가로 데려가 집단총살하다
1948.12.22. 토벌대는 표선면 가시리 주민중 도피자 가족 76명 집단총살하다
1948.12.31.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해제하다
1949.01.01. 무장대 100여명이 제주읍 오등리에 2연대 3대대 주둔지를 공격하여 국군 10명 전사, 게릴라 30명 사살하다
1949.01.03. 무장대는 제주읍 삼양리, 남원면 하례리, 한림면 협재리를 기습해 주민 살해하다
1949.01.03. 토벌대는 제주읍 도평리 일부 주민 70여명 총살하다
1949.01.06. 월평리 전투로 6중대 3명 전사하고 무장대 30명을 사살하다
1949.01.12. 무장대 200여명이 남원면 의귀리 2연대 2중대 습격하여 국군 4명이 전사하고 무장대 96명 사살하다
1949.01.12. 군인들은 전투 직후 수용 주민 80여 명을 집단 총살하다
1949.01.13. 무장대가 표선면 성읍리를 습격해 주민 38명을 살해하고 방화하다
1949.01.17. 토벌대는 조천면 북촌리 불태우고 주민 400여명 집단 총살하다
1949.01.22. 토벌대는 덕면 동광리·상창리 주민 등 80여 명을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에서 집단총살하다
1949.01.31. 육군본부는 유격전 전문부대인 6여단 산하 유격대대를 제주에 파견하다
1949.02.04. 무장대는 구좌면 김녕리 부근에서 2연대 병력 습격하여 소총 150정을 탈취하고, 2연대 국군 15명과 경찰 1명을 사살하다
1949.02.04. 토벌대는 제주읍 봉개지구(봉개·용강·회천리)에 대한 육해공군 합동작전 전개하여 수백명 총살하다
1949.02.12. 2연대 군인들이 관음사를 소각하고 스님 16명이 토벌대에 희생되다
1949.02.19. 경찰특별부대(사령관 김태일 경무관) 505명 제주에 파견하다
1949.02.20. 미군사고문단, 제주읍 도두리에서 민보단원들이 군경의 감독 아래 76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보고하다
1949.03.09. 무장대 50여명이 애월읍 노루오름에서 6여단 기습하여 국군과 우익청년단 등 36명 전사하다
1949.03.10. 이범석 총리·신성모 내무부장관이 제주도를 시찰하다
1949.03.30. 제주도전투사령부 토벌작전 전개하여 무장대 1000여명과 교전으로 178명을 사살하고, 소총 203정, 기관총 2정 노획하다
1949.05.26. 제2연대는 잔존세력 소탕으로 게릴라 은신처 급습하여 23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하다
1948년 말 3500여명의 남로당원들이 월북해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 교육훈련을 받았다.
북한은 이들 중 젊은 당원들을 선발해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한다.
이승만 정부는 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을 제거하여 숙군사업을 완료하였다.
북한은 인민군 13만5천여 명, 탱크 240여 대, 폭격기 200여 대를 동원하여 남침하였다
1949.06.01. 인민유격대 400여 명이 오대산지구로 침투하기 위해 38선을 넘다가 일부는 사살되고 나머지는 도주하다
1949.06.07. 경찰은 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를 사살하고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획득하다, 북한은 이덕구에게 국기훈장 3급 수여하고 남조선 혁명가로 칭송하다
1949.07.06. 인민유격대 200여 명이 오대산 방면으로 침투하려다 대부분 사살되고 약 30명이 중봉산 방면으로 도주하다
1949.07.22. 미국의 공산당 단속법이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통과하다
1949.07.30. 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 제거하여 숙군사업이 완결되다, 전체 5% 좌익(4,749명 숙청)
1949.08.04. 김달삼은 유격부대원 300명을 이끌고 경북 영양의 일월산으로 침투하나 대부분 토벌되다
1949.08.12. 철원지구 유격대가 선발대 15명을 용문산까지 남파, 실패하고 월북 도주하다
1949.08.15. 철원지구 본대 40여 명이 용문산까지 침투, 20여 명 사살, 나머지는 월북 도주하다
1949.08.17. 인민유격대 제1군단 약 360명을 태백산으로 남파, 대부분 토벌, 100여 명 도주하다
1949.09.28. 인민유격대 50여 명이 양양군 금옥치리로 침투, 국군 8사단에 의해 섬멸하다
1949.10.02. 제주비행장 인근에서 '1949년 군법회의' 결과 사형이 선고된 249명에 대한 총살형을 집행하다
1950.02.09.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 연설을 하다
1950.03.20. 김달삼이 정선군 삼운리에서 발견되어 반론산 골짜기에서 제185부대와 치열한 전투끝에 사망하다, 김달삼은 북한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1950.03.28. 김상호와 김무현 부대 약 700명이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 토벌대가 소탕하다
1950.06.25. 한국전쟁, 북한은 북한군 13만5천여명, 탱크240여대, 폭격기200여대 동원하여 남침하다
1950.06.25. 치안국장은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할 것을 지시하다
1950.07.25. 무장대가 중문면 하원리를 습격해 민가 99동에 방화하다
1950.07.27. 토벌대는 예비검속으로 제주읍 주정공장에 수감했던 사람들을 사라봉 앞 바다에 수장시키다
1950.08.04. 제주경찰서·주정공장 등지에 수감되어 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항 앞바다에 수장되다
1950.08.19.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예비검속자 수백 명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하다
1950.08.20.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면·대정면·안덕면 예비검속자 344명 중 252명 집단총살하다
1950.10.01~1951.04.22 제주 경찰은 7개월간 무장대 56명 사살하고 소총 11정, 수류탄 2발을 노획하다
1952.04.01. 제주 경찰은 치안국 작전지도반의 지도하에 30일간 '제주도지구 잔비섬멸작전'을 전개하다
1952.09.16. 무장대 5명이 제주방송국에 침입하여 숙직 중인 방송과장 등 3명을 납치하다
1952.10.31. 무장대가 서귀포발전소를 습격하여 방화하다
1952.12.25. 제주도 재산무장대의 완전섬멸을 위하여 경기·충남·경북에서 1개 중대씩 3개 중대의 경찰병력을 파견하다
1953.01.29. 육군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소령 박창암) 86명이 제주도에 투입하다
1953.05.01. 무지개부대 작전 종료하다
1953.06.15. 경기·충남·경북의 경찰 병력을 배속 해제하고 원대복귀하다
1954.01.15. 이경진 제주도경찰국장이 잔여무장대는 6명 뿐이라고 발표하다
1954.08.24. 미국은 공산주의자 단속법을 제정하다
1954.09.21.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하다
1956.04.03. 제주경찰청 사찰유격중대가 인민유격대 부사령관 정권수를 사살하다
1957.03.27. 제주경찰서는 사령관 김성규와 변창희를 사살하다
1957.04.02. 제주경찰서는 마지막 빨치산 오원권 체포되어 잔존 인민유격대 완전 소탕하다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 공산세력이 일으킨 무장 폭동으로 이를 진압하려는 군경과의 충돌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가슴아픈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된 국군과 경찰과 그의 가족과 제주도민에게 깊은 위로와 애도를 보낸다.
다시는 이땅에 극악한 공산세력이 날뛰지 않도록 저들을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제주 4.3사건은 공산당의 폭동이다"
1.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일어났다고 전 세계에 천명하였다.
2. 남로당 대정면 당위원장 이운방도 4.3의 주체는 공산주의자이고 목적은 공산통일 조국 건설이라고 증언했다.
3. 4.3 주동자 김달삼은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지하 선거를 통해 52,350명의 투표지를 가지고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김달삼은 북한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고,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4. 4.3폭동 주동자 김달삼 안세훈 강규찬 고진희 이정숙 문등용은 월북하여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북한정권 수립에 앞장섰다.
5. 1948.10.24. 남로당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 이덕구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하였고, 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6. 대한민국 건국 선거인 5.10선거 때 남로당은 인민공화국 건설을 주창하며 폭력으로 선거를 방해해 전국 200개 선거구중 북제주 2개 선거구가 선거무효 되었다.
7. 4.3폭동의 주동자들은 자칭 제주인민해방군이라 칭하면서 적기가를 부르고 인공기를 흔들며,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8. 제주 4.3 발발의 주체인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이며, 남로당 강령은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입각한 공산주의 체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9. 남로당 제주도당은 공식행사 때마다 항상 "스탈린 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라는 구호를 외치며, 그들이 공산당의 후예임을 밝혔다.
10.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음에도 남로당 폭도들은 건국 대한민국을 상대로 1957년 4월 2일까지 항적했고, 국민과 군경 1,756명을 살해했다.
11. 4.3 폭동 남로당 세력들이 남긴 유일한 문서인 '제주도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1948년 3월 중순경 상부로부터 무장 반격 지령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있다.
12. 6.25가 터졌을 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인민군지원환영회를 조직하고, 북한군이 상륙하면 그들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고 획책했다.
<제주 4.3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 출처
☞ 정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 제주 4.3 자료집 | 전 제주경찰서장 김영중
☞ 제주4.3평화재단 | 사건일지/경과개요, 제주4.3사건 일지 pdf
☞ 대한민국 역사 | 이영훈 저, 기파랑, 2014
☞ 뉴데일리 | 제주4.3사태, 민중봉기 아닌 공산폭동,2018.04.02
☞ 자유일보 | 6.25전부터 시작된 전쟁...유격대 남침 10차례, 2018.01.02
☞ 위키백과 | 제주 4.3 사건, 우남위키 | 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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