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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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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스토리아K 2020. 4. 2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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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0.14. 평양 소련군 환영집회에서 김일성 등장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김일성

 

1948.02.08. 북한정권은 조선인민군(총사령관 최용건, 부사령관 김책)을 창설하고 총 병력 6만, 탱크연대를 편성

1948.09.0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내각에는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 홍명희, 국가검열상에 김원봉 등으로 구성

1949.03.05. 김일성-스탈린 회담,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에 관한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타진

1945.03.05. 스탈린과 김일성 회담

 

1949.03.17. 소련과 북한은 문화 및 경제 관계 조약과 비밀 군사원조협정을 체결, 소련은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 제공을 약속

1949.03.18. 북한과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조중상호방위조약을 체결

1949.03. 모스크바를 방문중인 김일성과 박헌영

 

1949.06.30. 미군 남한 철수, 미국은 군사고문단 500여명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

 

1949년 7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과 제164사단이 북한으로 들어가 각각 조선인민군 제6사단과 제5사단으로 개편되어 6.25 전쟁 직전에 제6사단은 개성·옹진에 제5사단은 양양에 배치되었다.

북한 인민군 주력이 된 조선의용대(조선일보)

 

1949.08.14. 김일성은 스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조속한 대남 공격 필요성을 주장

 

제 15사단 병력 1만 명은 1950년 4월에 입북해 인민군 제12사단으로 개편되고, 이들 외 국공내전 기간 중 수천 명의 조선족 병사들이 북한으로 들어가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인민군에 편입된 조선족 병사들은 총 5만 명으로 추정된다.

 

1949.10.01.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마오쩌둥이 초대 국가주석이 됨

1949.12.16. 모택동-스탈린 회담

1949.12.21. 스탈린 70세 생일기념일에 마오쩌둥과 스탈린

 

1950.01.17.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8선을 돌파하겠다는 남침 계획을 건의

1950.01.26. 한국과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

1950.02.14. 중공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

기념우표

1950년 3월 초, 1주일간 29회의 공비습격이 있었고 38선 부근에서 18회의 분쟁이 있었다. 1950년 3월에는 북한이 곧 남침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북한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1950.03.30.~04.25.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협의하면서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의 군 내부에 많은 동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며 무력통일을 자신함

1950.04.05. 김일성-스탈린 비밀회담,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과 남침을 협의
1950.04.10.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허락했고, 중국의 모택동의 동의를 얻으라고 지시
1950.04. 인민해방군 독립 15사단(1만4000명)은 인민군 12사단으로 편입
1950.04.30. 소련의 스탈린은 대남공격을 승인하다, 모택동은 5월 14일에 승인

1950.05.11. 이승만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해 있고 미국의 원조가 부족하다고 호소

1950.05.13. 김일성-모택동 회담,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경으로 건너가 모택동의 동의를 받음, 북한의 발의와 스탈린의 승인과 중국의 참여로 남침을 위한 국제적 동맹을 맺음
1950.05.29. 북한은 8월 15일까지 서울에 통일 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남침 작전계획을 완성

 

6.25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의 공격사단 7개 병력 중 3분의 1이 중국에서 귀환해 온 조선의용군 산하 조선족 병력이었다. 미군 정보문서에 의하면 북한군 전체 장교 중 80%가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되었던 조선인이었다.


1950.06.07. 북한은 남침 계획을 완성해 놓고 남한에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을 발표

1950.06.09. 채병덕 참모총장은 연대장과 사단장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

1950.06.12. 북한군 전투부대 38선 부근으로 이동
1950.06.16.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를 얻고 남침일자를 확정
1950.06.19. 북한 방송은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제안 ▷미국 CIA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낮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없다고 판단
1950.06.22. 북한은 각 사단장 앞으로 남침 전투명령 1호 하달

1950.06.23. 북한군은 전투배치를 완료하다, 북한군 제1군단은 금천에, 2군단은 화천에 군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 사단은 서부전선으로부터 제6, 1, 4, 3, 2, 12, 5사단 순으로 배치

소련제 T-34 인민군 탱크부대

 

1950.06.24. 육군본부는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 북한군이 38선으로 집결하는 등 이상 동향이 보고
1950.06.24. 육군본부 장도영 정보국장은 인민군의 전면 남침을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보고했으나 묵살되고, 전방의 지휘관들의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개전 초기에 지휘혼란을 초래


김일성과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협의한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은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우회, 차단하여 국군의 주력을 격멸한 다음 남한 내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에 의한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1950.06.25. 한국전쟁, 국군 6만5천여 명, 북한군 13만5천여명 탱크 242대, 전투기 226여대

북한군 침공(출처: 중앙일보)

 

1950.06.25. 북한군 남침 개시,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화천을 거쳐 동쪽의 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야포와 박격포의 포격을 20~40분간 가한 후 보병을 돌격

북한군 남침

 

1950.06.25.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 300여 명이 청도 운문산지구로 침투하여 남하 중 사살

1950.06.25.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에게 "적대 행위 즉각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

1950.06.25. 옹진반도 전투(~06.30) 북한군 전차 중대에 맞선 방어전투에서 국군이 패배

1950.06.25. 의정부 전투(~06.26) 북한군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의 남침에 국군이 패배

1950.06.25. 고랑포 전투(~06.26) 개성 지역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북한군 남침을 저지

1950.06.25. 춘천지구 전투(~06.30), 국군 제6사단이 춘천-홍천지역에서 북한군 2군단의 총공격을 저지

 

춘천 전투

 

1950.06.25. 옥계 전투, 동해안에서 국군 경비함이 북한 상륙정과 수송선을 격퇴

1950.06.26. 대한해협 해전, 해군의 백두산함이 부산으로 침투하던 북한군 게릴라 600명을 실은 수송선을 격침

1950.06.25. 04시에 38도선 일대 경찰들은 남침상황을 치안국상황실로 신속하게 보고

1950.06.25. 05시경에 치안국장이 남침상황을 내무부장관에게 보고

1950.06.25. 06시에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은 전군 비상령을 하달하고 비상소집을 실시

1950.06.25. 06시30분에 내무부장관은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전투태세로 조치

1950.06.25. 07시경에 채병덕 육군총장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남침상황을 보고

1950.06.25. 07시에 국방부 보도과장이 중앙방송(KBS)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

1950.06.25. 08시경에 신성모 국방장관은 후방 3개 사단 출동과 수도경비사 예하 3개 연대의 출동대기를 명령

1950.06.25. 09시에 북한군은 개성을 함락

1950.06.25. 09시에 미 군사고문단도 북한의 전면남침을 확인하고, 무초 대사가 10시에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

1950.06.25. 10시경에 경무대경찰서장이 대통령에게 남침상황을 최초 보고

1950.06.25. 10시경에 국방장관은 수색의 1사단 사령부와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를 방문

1950.06.25. 10시부터 북한 전투기들은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에 출현

여의도 공군비행장

 

1950.06.25. 10시30분에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남침상황을 보고

1950.06.25. 11시경에 이승만은 손원일 해군 총장에게 미국에서 구입한 군함(3척)을 끌고 빠른 귀국을 지시

1950.06.25. 11시35분에 무초대사는 경무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전쟁 상황을 논의

1950.06.25. 12시에 국방부 담화를 발표

1950.06.25. 12시경에 야크 전투기 4대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과 통신소 등 서울시내 주요 시설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

야크 전투기

 

1950.06.25. 13시경에 이승만은 주미 한국대사관 장면 대사에 전화를 걸어 미국 지원을 지시

1950.06.25. 14시경에 외출외박 장병의 80~90%가 부대로 복귀

1950.06.25. 14시에 긴급 국무회의 개최하다, 국방장관은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 참석

1950.06.25. 15시에 무초 대사는 이승만과 회담이 끝난 후 국무장관에게 지원을 요청 ▷이승만은 105밀리 곡사포 90문, 60밀리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을 미국에 요청

1950.06.25. 17시경에 2대의 야크기가 김포비행장의 관제탑과 유류저장시설을 공격하여 큰 화재가 발생하고 미 공군 수송기 1대와 한국공군기 1대가 손상

1950.06.25. 19시경에 6대의 북한전투기들이 김포비행장을 다시 공격하여 미 공군 수송기 1대를 파괴

1950.06.25. 22시에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다시 불러 회동하고 다음날 새벽 04시에 전화를 걸어 미국의 지원을 촉구

1950.06.25. 20시30분 해군의 백두산함은 부산 북동쪽 54km 해상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600여 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1000톤급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

해군 1호 백두산함

 

1950.06.26.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지원을 요청

1950.06.26. 북한 전투기들이 용산 일대와 군 시설과 여의도 및 김포비행장, 경무대, 중앙청 일대에 기총소사를 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을 살포

1950.06.26. 06시에 무초 대사가 방송하고 08시에는 국방장관이 국군이 선전하고 있다는 요지로 방송

1950.06.26. 13시경 북한군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하고 서울 도심 진입을 시도

서울시내를 행진하는 북한군

 

1950.06.26. 14시경에 이승만은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에 방문

1950.06.26. 이승만은 맥아더에 도움을 요청하고 미대사 장면에게는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

1950.06.26. 김일성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여 조선인민유격대 임무를 알림

1950.06.27. 02시에 국방장관이 서울 함락을 알리고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수도를 수원으로 결정

1950.06.27. 03시경에 청량리에 적의 전차가 진입했다는 경찰의 보고에 따라 경무대를 출발

1950.06.27. 03:30. 이승만은 기관차와 3등 객차 2량의 특별열차에 탑승하여 피신

1950.06.27. 유엔 안보리는 유엔 회원국 참전을 7대1로 결의

1950.06.2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950.06.27. 미국은 해군과 공군에 출동 명령을 내림. 육군 출동 명령(06.30), 해병대 출동 명령(07.03)

1950.06.27. 보도연맹 학살 사건, 경찰은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을 구금하고 군경은 이들을 집단 학살

1950.06.27. 22시~23시에 3차례에 걸쳐 국민들에게 '미국의 지원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라디오 방송을 실시

1950.06.28. 00:30~01:00. 북한군 탱크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시내에 진입하여 서울을 점령

1950.06.28.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 탱크

1950.06.28. 02:28. 국군은 북한 전차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 폭파로 피난민 800여 명이 사망하여 책임을 물어 공병감을 사형에 처함(09.21)

한강다리 폭파

 

1950.06.28. 유엔 안보리는 "세계평화와 한반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공동 행동"을 결의

1950.06.28. 11:30. 서울 함락, 인민군이 입성하자 서울에는 의외로 많은 인파가 적기를 흔들며 환영

1950.06.28. 서울대병원 집단학살, 북한군이 국군 환자, 부상병, 애국지사 등 1천여 명을 학살

서울대학교병원

1950.06.28. 한강 전투(~07.03)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과 공방전에서 한강 방어선이 붕괴

1950.06.29. 미 해군은 해역 봉쇄 및 북한군에 폭격을 개시

1950.06.29. 미군 폭격기 B-29 18대가 평양을 공습하여 북한군 비행기 26대를 파괴

1950.06.29. 맥아더는 비행기로 한강 남안의 전선을 시찰하고 수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다

1950.06.29. 울진-평해 전투(~07.01) 국군 제3사단이 북한 제5사단과 지연전에서 후퇴

1950.06.30. 트루먼 대통령이 미 지상군의 투입을 허가

1950.06.30. 채병덕 참모총장은 서울 방어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되고 영남편성군사령관으로 좌천되어 하동전투에서 전사(07.27)

1950.07.01. 북한은 전시총동원령을 선포하고 17~30세를 징집하고 31~50세는 노무에 동원

1950.07.01. 미국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하고, 북한군이 한강도하를 개시

1950.07.02. 유엔회원국 36개국이 한국에 군사지원 성명을 발표

1950.07.04. 국군 제 23연대가 울진군 평해에서 철수

1950.07.04. 시흥-안양-수원 전투에서 국군이 인민군에 패배

1950.07.04. 동락리 전투(~07.10) 충북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1사단이 북한군 15사단과 격돌하여 국군 최초의 승리

1950.07.05. 오산 전투(유엔군 최초전투) 죽미령에서 미군 스미스 특임부대가 북한군 제3사단과 전투에서 후퇴

오산전투에서 미군 바주카포

1950.07.05. 진천 전투(~07.10) 진천과 충주에서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 제2사단과 공방전을 벌임

1950.07.05. 평택 전투(~07.12) 평택과 안성에서 미군이 북한 제3사단과의 전투에서 후퇴

1950.07.06. 부산에서 한·미연합해군방위사령부(총사령관 맥아더) 설치안 가결

1950.07.07. 유엔 안보리는 유엔군 참전을 가결하고 16개국 군대를 유엔군으로 편성하고 맥아더를 사령관에 임명

1950.07.07. 천안 전투(~07.08) 미군 제24사단이 북한 제3사단과 전투에서 후퇴

1950.07.07. 충주-수안보 전투(~07.09) 국군 제6사단이 북한 제1사단과 전투에서 후퇴

1950.07.08. 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 대한 학도의용대를 결성

1950.07.09. 육군본부는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부서로 민사부를 설치

1950.07.09. 전의 전투(~07.11) 조치원에서 미군 제24사단이 북한 제3사단과 전투에서 후퇴

1950.07.12.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에게 맡기는 '대전협정' 체결, 군통수권의 美軍이양

1950.07.13. 이화령-문경 전투(~07.17) 국군 제6사단이 북한 제1사단과 전투에서 후퇴

1950.07.13. 원산 폭격, 미 극동공군은 B-29 56대를 동원하여 원산 선착장과 정유 저장시설을 폭격

B29 폭격기의 원산 정유 시설 폭격

1950.07.14. 이승만은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에게 이양

1950.07.14. 대전 전투(~07.21) 미군 제24사단과 북한 제1군단과 전투에서 미군은 인민군의 탱크를 저지

1950.07.15. 북한군 제3사단은 공주로 우회하여 금강 도하

1950.07.15. 금강 근처에서 포를 점검하는 미군

1950.07.16. 정부를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

1950.07.17. 정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전

1950.07.18. 미 제1기병사단이 포항에 상륙

1950.07.18.~07.20. 미 제24사단은 대전에서 인민군 제3,4사단과 격전, 반격 시간 확보

1950.07.20.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딘 소장이 포로가 됨

1950.07.22. 상주 전투(~07.31) 국군과 미군 제25사단이 북한 제1사단과 지연전에서 후퇴

미군 24연대의 화포 지원

1950.07.22. 영덕-강구 전투(~08.09) 국군 제3사단이 북한 제2군단과 지연전에서 후퇴

1950.07.24. 거창 전투(~07.27) 서해안 전투사령부, 민기식 부대는 북한 제4사단과 방어전투에서 후퇴

1950.07.24. 북한군은 대전과 광주를 점령

1950.07.25. 하동 전투(~07.31) 국군과 미군 제24사단이 북한 제4,6사단과 지연전에서 후퇴

1950.07.26. 노근리 학살사건(~07.29) 충북 영동에서 미군에 의한 마을주민 300여명 살해됨

1950.07.31. 유엔 안보리: 한국구호결의안 채택

1950.08.01.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밀림,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이전

1950.08.02. 미 해병 제5여단, 부산 상륙

1950.08.03. 유엔군: 워커라인(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방위선) 구축

1950.08.03. 다부동 전투(~08.29), 국군 제1사단과 미군이 북한군 4개 사단과 전투에서 승리, 한국전쟁 최고 격전지 중 하나로 북한군 1.2만 명, 아군 3,409명 전사

국군의 포격 장면

1950.08.04. 낙동강 방어선 전투(~09.15)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설정한 최후 방어선(워커라인)을 사수

1950.08.05. 낙동강 돌출부 전투(~08.17)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인민군 4사단에 맞서 미군 24사단이 벌인 전투, 인민군 4사단은 전투력 상실

1950.08.10. 포항 전투(~08.31) 학도병, 국군 제3사단, 민부대가 북한군 제5, 12사단과 방어전투로 포항을 탈환

대한학도의용대의 학도병

1950.08.11. 포항여중 전투, 학도병 71명이 국군 3사단 사령부 방어를 위해 벌인 전투로 47명 전사, 북한군의 포항 진출을 지연시킴

1950.08.16. 왜관 융단폭격, 미국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일대에 26분 동안 960톤 폭탄 투하

왜관융단폭격작전

1950.08.04. 부산 교두보 전투(~09.18) 유엔군이 북한군의 대공세를 저지하여 전세가 역전

1950.08.09. 기계-안강 전투(~09.22) 국군 제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 제12사단과 방어전투에서 승리

1950.08.27. 유엔군, 북한 남진 저지할 목적으로 왜관 철교 폭파

1950.09.02. 낙동강 근처 파괴된 북한군 탱크와 트럭(연합뉴스)

1950.09.05. 영천 전투(~09.12) 국군 제7, 8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과 방어전에 승리

1950.09.05. 형산강 방어 전투(~09.13) 국군 제 3사단이 북한군 제5사단과 방어전에 승리

1950.09.06. 일본 도쿄 지역 재일 한국인 학생들이 6.25전쟁 참전을 결의

참전 결의를 표현한 태극기(전쟁기념관)

1950.09.06. 신녕전투(~09.09) 국군 6사단이 인민군 8사단의 공격을 저지

1950.09.15. 인천상륙작전(~09.20) 유엔사령관 맥아더 지휘로 7만5천여명 병력과 261척 해군함정을 투입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 중 군수장비 이동 장면

 

1950.09.15. 장사상륙작전(~09.28) 학도병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장사에 상륙하여 북한군 보급로를 차단에 성공하고 철수

장사상륙작전에서 문산호와 국군 제1유격대대 소속 학도병

1950.09.16. 낙동강전선의 유엔군도 반격하여 1주일 만에 김천, 대전, 수원으로 진격

1950.09.17. 국군과 유엔군은 김포 비행장을 점령하고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로 진격

1950.09.28. 서울 수복,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 서울은 민간인 9,500명 피살되고 4,200명 납치

서울을 수복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는 해병대원들
1950.09.28. 북한이 붙인 포스터를 보고있는 미 해병대 병사들

1950.09.28. 李承晩 대통령: 以北진격 언명,  워커 중장; 38선 돌파 명령(09.30)

1950.09.28. 북한은 경남지역 조선인민유격대를 함양군 휴천면에서 결성. 진주군⋅산청군⋅함양군이 주요 근거지가 됨

1950.09.29.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개최

1950.09.30. 이승만 대통령이 전군에 38선 돌파 명령을 하달

1950.09.30. 북한군이 정읍 고부면에서 민간인 317명을 학살하다. 반공인사 입석리 폐금광 150명, 유치장 167명

1950.10.01. 국군 제1군단은 38선 넘어 북진을 개시, 북진 기념일이 '국군의 날'이 됨

1950.10.01. 삼팔선을 돌파하는 화랑부대 장병들

1950.10.02. 원산 상륙 작전(~10.14) 미 해병대가 함경남도 원산에 상륙

미 해병 1사단의 원산 상륙 작전

1950.10.04. 지리산공비토벌작전(~1953.05.01) 지리산 지역의 남부군단 토벌을 위해 국군 11사단, 수도사단, 8사단, 1사단이 작전을 수행

1950.10.05. 북한은 조선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를 발족하고 전남 지역 유격을 총괄 지휘

1950.10.07. 유엔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

1950.10.08.~10. 북한군이 대동강 인근 기암리에서 민간인 2천여 명을 학살

함흥시에서 북한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

1950.10.10. 원산탈환전투,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은 북진작전을 전개하여 원산을 탈환, 북한군이 양민 600여 명 학살

미공군이 원산의 철로를 폭격

1950.10.10. 중공의 주은래는 스탈린을 방문해 군사원조와 공군지원을 요청

1950.10. 중공군의 탱크 앞 도열

1950.10.12. 이승만 대통령이 원산을 방문

1950.10.14. 저격능선 전투(상감령 전투) 강원도에서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에 승리

중국의 상감령전투 선전 사진

1950.10.17.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은 함흥을 거쳐 청진에 입성(11.25)

1950.10.18. 북한군 패잔병이 강릉시 노암동 기찻길 터널에서 반공인사 100여 명을 학살

1950.10.19. 평양 탈환, 국군 제1,7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을 점령

1950.10.19. 평양에 입성한 국군
평양 탈환 작전을 마친 백선엽 제1사단장과 밀번 미 1군단장

1950.10.19. 중공군 총 18개 사단 26만 명 병력 참전. 전체 92만6천명, 총사령관 팽덕회 지휘 하에 중국군 압록강을 도하

중공군 압록강 도하

1950.10.20. 낙하산부대 400여 명이 평양부근에 투하

낙하산 부대 400여 명이 평양부근에 투하

1950.10.20. 희천 전투(~10.23) 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18사단의 1개 연대에 승리

1950.10.21.북한 청진근처 해안에서 함포를 발사하는 USS 미주리호

1950.10.23. 초산 전투(~10.26) 국군 6사단이 북한군 8사단과 전투에서 압록강변까지 진격

1950.10.24. 온정리 전투(~10.30) 국군 6사단이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철수

1950.10.25. 중공군 1차 공세, 국군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운산에서 최초로 중공군 제39군과 교전

1950.10.26.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 중부는 장진호,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

1950.10.26. 운산 전투(~11.04) 국군과 미군은 운산-영변 지역에서 중공군과 접전에서 패배

운산전투에서 중공군에 사로잡힌 미군들

1950.10.26. 국군 제6사단 7연대 1중대는 압록강변까지 진격하여 초산을 점령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대거 상륙 

1950.10.27. 정부는 서울이 수복되고 수도를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

1950.10.29.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을 시찰하고 평양 연설을 함(10.30)

"우리 자유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로 뭉치자"

1950.10.30.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연설에 모인 평양 시민들

1950.11.04. 중국 공산당 및 민주제당파, <항미원조연합선언> 발표. 중국군은 한반도로 진주한 상태였다.

1950.11.04. 미8군사령부는 중공군 2개 사단이 유엔군과 교전 중이라고 발표

1950.11.05. 미 24사단이 청천강 북안에 증원부대를 투입

1950.11.06. 맥아더 장군은 중국 월경(越境) 성명을 발표, 중공군 2개 사단 참전을 공식 확인함 

1950.11.06.~11.25. 모택동은 추가로 중공군 20만명을 북한에 투입

1950.11.11. 정부는 전쟁기 부역활동 혐의자 처벌에 관한 부역자처벌특조령 공포

1950.11.15. 조선인민유격대(이현상)는 강원도 세포군을 출발하여 9개월 후에 지리산에 도착

1950.11.20.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의 개입으로 한국전에서 원폭 사용을 언급

1950.11.20. 청천강 근처에서 활약중인 제2보병사단 병사들

1950.11.21. 미10군단은 압록강변 혜산진을 점령

1950.11.24.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고 중공 국경선까지 총진격 명령을 하달

1950.11.25. 중공군 2차 공세, 중공군과 북한군이 유엔군과 한국군에 총반격 개시

1950.11.25. 청천강 전투(~12.02) 중공군이 청천강 계곡을 따라 진격하여 유엔군은 패배하고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

1950.11.26. 장진호 전투(~12.13)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연합군과 중공군의 치열한 전투에서 연합군이 38선 이남으로 완전 철수, 전사상자가 4천여 명이 발생

1950.11.26. 장진호 전투

1950.11.26. 제2차 청천강 전투 시작

1950.11.29. 중공군 40만명이 나팔불고 꽹가리를 치며 육탄전의 인해전술 공격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국군과 미군이 처참하게 패하자 총 퇴각명령을 지시

1950.12.01. 유엔군사령부는 유엔군 전면 후퇴를 결정

1950.12.04. 평양 철수 작전, 유엔군은 평양에서 철수하고 중공군이 평양을 점령

1950.12.05. 국군 1사단의 후퇴

1950.12.06. 맥아더 원수는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만주폭격, 중국 해안 봉쇄, 증원군 파견 등을 요구함

1950.12.07. 유엔정치위는 중공군철수결의안을 가결

1950.12.14. 유엔총회: 한국정전위원단(이란·인도·네덜란드)설치 결의, 周恩來 중공 외교부장; 접촉거부 성명(12.21)

1950.12.15. 흥남철수작전(~12.24) 미 1해병사단 흥남으로 집결하여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

1950.12월 중순 흥남부두의 군인과 피란민
1950.12.24. 폭파되는 흥남부두

1950.12.19. 국군이 북한 평양을 탈환

1950.12.24. 정부는 중공군 서울진격으로 서울시민에 피난령을 발령

1950.12.26. 북한군과 중공군은 북한 전 지역 탈환

1950.12.31. 3차 총공세(신정 공세) 북한군과 중국군은 3차 총공세를 개시하여 38선 이남으로 밀고 내려옴

1951.01.01. 중공군의 신정 공세 개시, 중공군은 30여 만명의 병력으로 38선을 돌파하여 남침(3차 공세)

1951.01.01. 의정부 전투(~01.04) 영국과 호주 연합군의 중공군 공세에 맞서 지연 작전이 성공

1951.01.03. 다시 부산으로 수도이전, 전국은 피난민 행렬로 이어짐

피난민의 행렬

1951.01.04. 1·4 후퇴,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연합군은 경기도 안성까지 후퇴 ▷트럭을 몰고 가던 운전병의 부주의로 미군의 지프를 들이박아 군단장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전사

1951.01.06. 원주 전투(~01.12) 미 10군단과 연합군이 북한군과 중공군을 격퇴하고 원주를 탈환. 서부 전선에서 퇴각하던 미군이 공세로 전환

원주에서 이동중인 미 제2보병사단

1951.01.14.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퇴각

1951.01.15.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공군 10전투비행전대 F-51 전폭기 6대는 적의 대공포화를 뚫고 대동강 승호리 철교를 폭파

1951.01.23. 수리산 전투(~01.31) 경기도에서 미군과 터키군이 중공군과 전투에서 승리

기관총을 겨눈 터키군

1951.01.24. 중공군은 평택-원주-삼척까지 진격해 내려옴

1951.01.25. 선더볼트 작전(~02.20) 경기 남부와 강원도 중부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유엔군이 반격

1951.01.30. 모락산 전투(~02.03) 경기도에서 국군 1사단이 중공군과 전투에서 승리

1951.01.31. 유엔정치위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

1951.02.07. 산청·함양 학살 사건, 국군이 경남 산청군·함양군 민간인 700여 명 피살

1951.02.09. 거창양민학살 사건(~02.11) 국군이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 총살

1951.02.10. 제2차 인천상륙작전, 한국 해군과 해병대 170명이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시를 탈환

1951.02.10. 서울 탈환, 연합군이 인천과 서울을 재탈환함

1951.02.11. 중공군 4차 공세, 중공군은 중서부 전선의 연합군을 섬멸하기 위해 총공세를 전개

1951.02.11. 횡성 전투(~02.12) 횡성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로 국군 제 8사단이 고립되어 패배

1951.02.13. 지평리 전투(~02.16) 미군과 프랑스군이 중공군 공격에 맞서 크게 승리

중공군을 막아낸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1951.03.03.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에 소련군 2개 항공사단과 트럭 6000대를 공급

1951.03.15. 서울 입성 후 중앙청에 집결하는 1사단 장병들

1951.03.16. 국군 1사단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을 회복

1951.03.19. 유엔군이 전 전선에서 진격하고 공산군은 총퇴각을 개시

1951.03. 센츄리온 탱크와 진격하는 영국군

1951.03.24. 맥아더는 독단적으로 중공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성명을 발표

1951.04.03. 강원도 양양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1951.04.11.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전격해임하고 리지웨이 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

1951.04.22. 중공군 5차 공세(~04.29) 중공군 4월 공세·춘계 공세로 서부전선을 주공격으로 약 30개 사단을, 중부전선에 북한군 포함 15개 사단을 투입한 중국군의 최대 병력과 장비를 투입

1951년 춘계 공세를 앞둔 중공군

1951.04.22. 임진강 전투(~04.25) 영국군 제29보병여단이 중공군을 저지하면서 후퇴

1951.04.22. 율동 전투(~04.23) 필리핀군이 중공군 44사단 공세를 방어

1951.04.22. 사창리 전투(~04.24) 국군 6사단이 중공군 4개 사단과 방어전투에서 패배

1951.04.23. 가평 전투(~04.25) 국군과 영연방군이 중공군 공세를 저지

가평고지로 향하는 캐나다군

1951.05.15. 중공군 6차 공세(2차 춘계공세) 중공군 10만 명이 소양강 동쪽의 국군과 미군 제10군단을 공격

1951.05.16. 현리 전투(~05.22) 강원도 인제에서 국군 3군단이 중공군 6, 12군단의 공세로 방어에 실패

현리전투에서 중공군
1951년 중공군 춘계 공세로 포로가 된 한국군

1951.05.17. 용문산 전투(~05.21) 국군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 21,450여 명을 섬멸

국군 6사단 용사들

1951.05.26. 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는 청주시를 점령하여 좌익 죄수들을 탈옥시키다

1951.05.26. 파로호 전투(~06.28) 화천호 일대에서 국군 6사단이 중공군 대파하고 이승만은 화천호를 "오랑캐를 대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라고 명명

1951.06.09. 정부는 통일없는 휴전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

통일없는 휴전 결사반대

1951.06.15. 국군과 유엔군은 문산-철원-김화-화천-간성을 잇는 전선까지 진출, 국군 6사단은 양평 용문산에서 화천까지 밀고 올라가 중국군 6만 2000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음

이동하는 국군들

1951.0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는 휴전회담을 제의하나 이승만은 거부(06.25)

1951.06.29.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리지웨이 장군에게 정전교섭을 명령

1951.06.30. 리지웨이 사령관이 원산만 덴마크 병원선 함상에서의 휴전회담을 제의하다, 공산측은 회담장소로 개성을 제의(07.01)

1951.07.10. 휴전 예비회담을 개성에서 개최, 유엔의 소련 대표 말리크가 정전협상 제의, 중국·북한·미국이 수락, 유엔군과 공산군의 휴전회담은 전쟁사상 가장 긴 협상기간을 기록함

휴전회담이 열리는 개성 내봉장

1951.08.16. 피의 능선 전투(~09.05) 강원도에서 국군과 미 제2사단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승리

1951.09.08.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연합군 점령국에서 국권을 완전 회복, 발효(1952.04.28)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식

1951.09.13. 단장의 능선 전투(~10.13) 강원도에서 미 제2사단과 유엔군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승리

1951.09.26. 한국전 최대 공중전으로 유엔 공군 101대, 미그기 155대 공중전을 전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 F-86 세이버 전투기

1951.09.28. 한강 해전(~09.30) 호주 순양함이 중공군과의 교전에서 승리

1951.10.03. 코만도 작전(~10.12) 유엔 연합군의 공세로 중공군 제42, 47, 65군을 섬멸

1951.10.03. 마량산 전투(~10.08) 유엔 연합군이 중공군과 고지전에서 승리

1951.10.15. 트루먼 대통령은 자유세계 방위강화를 역설

1951.10.25. 휴전회담을 판문점에서 재개

1951.12.01.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개시

지리산공비 토벌대

1952.01.24. 지리산 대성골 전투, 토벌대는 300여 명을 사살하고 251명을 생포하여 경남 지역 빨치산이 전멸

1952.01.18. 이승만 대통령이 평화선 선포(이승만 라인)하다,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 선언

1952.01.20. 육군사관학교 개교,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정규 육사 1기생이 입교

1952.02.18.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좌익계 폭동으로 69명을 사살하고 미군 1명 사망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1952.04.28. 정전회담 본회담 재개(중립국감시단구성 합의)

1952.05.07.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좌익계가 돗드 소장을 3일간 납치하다, 재폭동(05.20) 폭동 격화(06.10)로 포로 160명, 미군 16명 사망

1952.05.14. 정부: 제4차 개헌안(대통령직선·양원제) 제출, 부산에 계엄령 선포(05.25), 李鍾贊 육참총장 파병 거부, 부산정치파동(05.26), 발췌개헌안 통과(07.04)

1952.05.24. 한미경제조정협정, 마이어 협정,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문제를 조정,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설치

1952.05.25. 비상계엄령 선포(~07.28), 부산.경남.전남.전북에 선포

1952.06.23. 수풍댐 폭격(~06.27) 유엔군 공군이 145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하여 수풍댐 시설 90%를 파괴

미 공군의 수풍댐 폭격

1952.06.28.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상을 거부함 

1952.07.05. 원산만을 7시간 맹포 격전

1952.07.11. 평양대공습작전, 미 제5공군과 해군 함재기 등 822대 동원하여 평양을 공습하다. 2차는 284대로 공습(08.04), 3차는 1,122대로 공습(08.29)

1952.07.23. 백선엽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

1952.10.06. 백마고지 전투(~10.15) 철원 북방에서 국군 제 9사단은 중공군 38군의 3개 사단을 궤멸

백마고지 전투(전쟁기념관)

1952.10.21. 삼각고지 전투(~10.25)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12, 14군단에 패배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중공군 진지를 관측하는 국군들

1952.10.23. 고왕산 전투(~10.24) 경기도 연천에서 캐나다군이 중공군과 공방전에서 승리

1952년 임진강 유역으로 지나는 캐나다군 셔먼전차

1952.11.18. 후크고지 전투(~11.19) 영연방 1사단이 중공군과 전투에서 고지를 사수

1952년말 화천 2군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테일러 미8군사령관

1952.11.26. 원산 폭격, 유엔군 F-80, F-84 등 140대의 폭격편대는 원산을 연속 폭격

원산 폭격

1952.12.02.~12.05.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방한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

1952.12.03. 광릉의 수도사단을 방문한 이승만과 아이젠하워

1953.04.21. 국회는 북진통일을 만장일치로 결의

1953.04.26. 휴전 반대 시위

1953.05.08. 이승만 정부는 미국 정부에 휴전 반대를 통보

1953.05. 철원지구 전투에서 해병대원

1953.06.08. 포로교환협정 체결, 유엔군과 공산군은 송환을 원하지 않은 포로를 중립국송환위원회로 넘기는 안에 서명, 포로교환(08.05~09.06)

1953.06.10. 중공군 7차 공세(6월 공세) 철원과 화천 북방 금성지구에 중공군 3개 군단이 국군 2군단의 고지를 점령하고 남하

1953.06.18.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다, 반공포로 3만5457명 중 2만6424명을 일시적으로 석방

반공포로 석방

1953.06.29. 화살머리고지 전투(~07.11) 철원에서 국군 2사단이 중공군 37사단과 전투에서 고지를 사수. 국군은 180명이 전사하고 중공군은 1300명을 사살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하다

1953.07.13. 7.13 공세금성 전투(~07.20) 휴전회담이 임박한 시점에 중공군의 기습적인 총공세로 양측이 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

중공군 인해전술
1953.07.13. 금성 전투

1953.07.15. 베티고지 전투(~07.16) 연천군에서 국군 1사단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연대와 전투에서 고지를 사수

1953.07.27.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조인으로 오전 10시 모든 전선서 전투를 중지, 국제 연합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과 북한의 김일성, 중공의 팽덕회가 협정 문서에 각각 서명

휴전협정

1953.07.30. 쌍방은 현재의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변경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현선에서 남쪽으로, 공산군측은 북쪽으로 각각 2km씩 철수하여 비무장지대(DMZ)를 만들고,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

 

한국전쟁은 만 3년 1개월 2일 동안 세계사에서 1차,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세 번째로 비참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참조

☞바로가기 |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

☞바로기기 |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

 

▶ 출처

☞한국역사문화신문 | 6.25 남침 극비문서 공개,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합작품, 2019.07.08.

☞조선일보 | 조선의용대원 80%가 결성한 조선의용군, 북인민군의 뿌리가 됐다, 2019.06.14.

☞미래한국 | 스탈린, 김일성의 남침전쟁 승인하다, 2015.04.10.

☞미래한국 |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2015.06.29.

☞블루투데이 |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 및 좌익측의 민간인 학살 행위, 2012.05.14

☞잊을 수 없는 6.25전쟁 | 박윤식 저, 도서출판 휘선, 2012

☞월간조선 | 백선엽이 만난 6.25전쟁의 영웅들, 2010.05

☞월간조선 | 6.25 남침 직전 중공군 5만 명 전선에 배치됐다!, 2007.12.

☞국가기록원 | 6.25전쟁 연표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 한국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