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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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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스토리아K 2020. 5. 2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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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초기에 부산 교두보 방어작전의 최대 결전이었던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저지, 격멸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이 가능케하였다. 그리고 38선 돌파와 미군에 앞서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을 선봉 입성하였고, 1.4후퇴 후의 서울 재탈환시에도 최선봉에 섰다. 지리산 공비토벌을 비롯한 주요 작전에서 헌신적인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국군뿐만 아니라 UN군에 의해서도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백선엽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시기에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만주군 보병으로 입대하여 간도성 간도특설대로 전임되어 해방전까지 3년간 복무하였다.

 

1920.10.09. 간도참변(~11.05) 항일 독립군이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자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면서 간도일대에서 조선인을 학살, 독립군들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밀산에서 독립군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1920.11.23. 백선엽은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에서 출생하여 1939.03. 평양사범학교 졸업

1921.06.27. 자유시 참변, 러시아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하여 독립군 300여명이 사망하고 900여명이 포로가 되어 연해주 지방의 조선 독립군 세력은 완전히 와해

1923.09.10. 관동 대학살, 일본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 6천여 명을 학살

1925.06.11. 미쓰야 협약,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 소탕을 합의하여 독립군 활동이 위축

1927.08.01. 제1차 국공내전國共內戰(~1936.12.22)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국 재건을 두고 일어난 내전으로 중국 공산당이 승리

1928.04.04. 장제스의 총 70여만 명의 북벌연합군이 북벌을 재개

1930.05.30. 간도 5.30 사건, 간도 일대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항일 무장봉기

1931.07.01. 만보산 사건,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충돌

1931.09.18. 만주사변(~1932.02.18) 일본이 유조구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침공하여 만주 전역을 점령

1931.11.07. 루이진(瑞金)에서 마오쩌둥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

1932.01.28. 제1차 상하이사변(~03.03)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하이를 점령

1932.03.01. 만주국 건국, 일본군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옹립하고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선포

1932.09.19. 쌍성보 전투,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 연합으로 일본에 승리

1934.10.15. 대장정(~1935.10.) 중국 공산당 홍군은 장제스 군에 쫓겨 남부 장시성 서금에서 탈출하여 대장정 돌입

1937.07.07. 중일전쟁(~1945.09.02) 일본의 대륙 침략 전쟁

1937.08.13. 제2차 상하이사변(~11.12) 일본 항저우 상륙, 상하이 공격, 난징 공습

1937.08.22. 팔로군 창설, 중국 공산당의 당군으로 후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됨

1937.09.22. 2차 국공합작, 중일 전쟁에 중화민국 국군과 참전

1937.12.13. 난징대학살(~1942.03.04) 일본군이 중국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중국인 30만 명을 학살

1938.02.23. 육군특별지원병령 공포, 일본 정부는 조선인의 황민화와 병력 자원화

1938.04.01. 국가총동원법 공포, 일본이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해 식민지내 전쟁 동원령

1938.06.09. 중국 황하강 대홍수, 중일전쟁 중 일본군 방어위해 제방을 파괴하여 80만명이상 사망

1938.09.15. 간도특설대 창설,  만주국 치안부 산하 조선인 특수부대로 총 병력은 360명으로 항일무장세력을 소탕

 

당시 만주에는 동북항일연군 등 다양한 항일조직이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일본군과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연합작전에 밀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징위가 사살되고 남은 부대가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1943년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북항일연군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 북한정권 수립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1938.10.10.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혁명당은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

1939.07.08. 국민 징용령 공포, 일제는 조선인 45만명 이상을 강제노동에 징발

1939.09.01. 제2차 세계대전(~1945.09.02)

1940.09.17. 중화민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결성,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임명

1941.07.10.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팔로군 포병사령관 무정이 사령관을 맡음

1941.12.08. 진주만 공격,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

1941.12.0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

1941.12.30. 백선엽은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제9기생으로 졸업, 이후 만주군 보병 제28단에서 근무

 

간도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하였고,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3.02. 함경북도와 접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간도특설대로 전임되어 3년간 근무

 

간도특설대 출신이 한국전쟁에서 연대장급으로 활약하였고, 한국전쟁 중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 한국 해병대의 초대 사령관 신현준 장군, 2대 사령관 김석범 장군, 육군대장에 오른 임충식 장군 등이 이곳 출신이다.

 

1943.10.20. 일본 육군성, 1943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 규칙 공포, 전문학교와 대학의 법문계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도를 대상으로 학도지원병 모집

1943.12. 만주국에서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

1944.01.20. 조선인 학도지원병 3,050명이 특별지원 형식으로 일본군에 입영

1945.08.11. 중국 공산당, 조선의용군 2000명을 만주로 진격, 현지 조선인 충원하면서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단과 제164사단, 독립15사단으로 확대 개편

1945.08.15.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종결칙서를 방송

1945.09.07. 미국 극동 군사령부는 대한민국의 군정을 선언, 미군이 정부 수립 전까지 통치

1945.10.14.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 개최

 

1945.11.09. 중국 國·共내전 개시, 휴전협정 성립(1946.01.10), 전면내전 재개(1946.07.12), 國·共평화회담 개시(1949.04.01), 결렬(1949.04.20)

1945.11.24. 해방 후 항일운동가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공산주의체제를 피해 월남(12.28)

1945.12.17.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에 취임

1945.12.05. 군사영어학교 설립, 백선엽은 월남 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임관(~1946.02.26)

1945.12.20. 이승만은 조선공산당과 관계 단절을 선언,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발표
1946.01.15. 백선엽 국방경비대 입대, 국방경비대 창설(초대 사령관은 미군 중령 존 마샬)

1947.01.01. 중령 진급과 동시에 국방경비대 제5연대장 역임

국방경비대 제1연대장 채병덕과 제2연대장 이형근은 일본육사 출신이었고, 제3연대장 김백일과 제4연대장 정일권, 제5연대장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1947.12.01. 제3여단 참모장

1948.04.03. 제주 4.3 사건 발생,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 명이 12개 지서를 공격
1948.04.11.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미군정 통치권 인수, 임시정부 해산
1948.10.19. 여수순천반란 사건(~10.27) 이후 공산 게릴라 소탕 및 숙군 사업을 지휘
1948.12.15. 국방부는 육군본부 정보처 소속이던 백선엽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
1948.12.25. 대령 진급

1949.01.20. 숙군사업 실시(~07.30) 육군본부 정보국은 특별수사과를 설치하고 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을 제거하여 군 전체 5%인 좌익 4,749명을 숙청

백선엽 정보국장(오른쪽 두번째)과 김창룡 대위(맨오른쪽)

숙군과정에서 박정희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백선엽은 박정희에게 전향을 권고한다.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 총책으로 지목되어 검거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숙군 과정에서 검거되었던 박정희의 구명에 앞장서 형 집행정지를 얻어내고, 박정희는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6.25전쟁에서 정보국 제1과장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1949.07.30. 백선엽 대령은 광주 주둔 제5사단장
1950.04.23. 개성(서부전선)을 관할하는 제1사단장(대령)으로 부임
1950.06.25. 6.25 전쟁에서 육군 제1사단을 지휘하나 북한 T-34/85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밀려 후퇴

1950.06.25. 한국전쟁, 북한군 13만5천여명 탱크240여대, 폭격기200여대 도발
1950.06.25. 개성과 문산지구에서 남하하는 북한군과 맞서 교전
1950.06.26.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서 최경록 대령의 연대와 함께 북한군과 교전

1950.07.20. 대전 함락
1950.07.25. 대구로 후퇴하던 중 사단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공로로 준장으로 승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미 1군단에 배속되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었고, 북한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공격을 해왔다.

1950.08.13. 왜관~다부동에서 국군 제1사단은 주 저항선에 3개 연대를 배치하고 백병전을 벌임

1950.08.16. B-29폭격기 99대로 북한군 진영인 왜관 북서쪽 낙동강변에 960톤의 폭탄을 집중 투하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8천여 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려 하자 백 장군이 맨 앞에 나서 "내가 앞장설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독려했다.

 

1950.08.21. 다부동 전투, 국군 제1사단이 미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궤멸시킴, 한국 전쟁의 최고 격전지 중 하나로 북한군 1.2만명이 사망하고 아군 3,409명이 전사

1950.09.15. 인천상륙작전(~09.20) 맥아더 주도, 7만5천여명 병력, 261척 해군함정 투입

1950.10.01.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하면서 북진을 시작

1950.10.19. 평양 탈환, 백선엽 장군은 대동강을 도하해 평양에 입성

평양에 입성한 뒤 프랭크 밀번 미1군단장에게 전황을 설명하는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군에 앞서 평양에 입성했고 1.4후퇴 뒤 서울 탈환 때도 최선봉에 섰다. 그는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휴전회담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군 최초 대장에 올라 두 차례 육군참모총장을 맡으며 군 재건을 이뤄냈다.

1951.02. 제1사단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
1951.02. 미8군 리지웨이 사령관이 국군 1사단 백선엽 사단장과 작전 논의

1951.03.15. 1사단은 미군과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을 회복

1951.03.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과 백선엽 사단장

 

1951.04.15. 백선엽은 소장으로 진급하고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제1군단장되다

제1군단은 오늘의 휴전선이 38선을 넘어 강원도 북부 해안 고성까지 치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1군단의 전공을 짐작할 수 있다.

1951.05.16. 현리 전투(~05.22) 국군 3군단이 북한군과 중공군 공세로 방어에 실패
1951.07.10.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에 한국군 대표로 참석

휴전회담을 출발 전 헬기 앞에 선 유엔군 대표들. 백선엽 장군(왼쪽 세번째)

1951.11.16.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야전사령부를 지휘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이 1951년 말에 작성하여 미 정부에 보고하고, 1992년에 비밀 해제된 문건에는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 최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소장. 33세. 일본 만주군관학교.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육군 중위. 한국 육군에서 최상(best)의 야전지휘관으로 평가됨. 참모와 지휘관 양쪽 모두 탁월한(exllent) 기록 보유. 친미적.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말하고 읽고 씀. 한국 육군에서 가장 걸출한(most outstanding) 장교임>


1952.01.12. 중장으로 진급

1952.04.05. 새로 창설된 제2군단장이 되어 중부전선을 담당, 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강릉에 있는 제 2군단장으로 부임
1952.07.23. 백선엽 중장,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32세)

1952.12. 수도사단을 시찰중인 아이젠하워와 이승만 대통령, 백선엽 참모총장

1953.01.31.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육군대장으로 진급

대장에 진급한 백선엽과 이승만 대통령

1953.03.26.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8군사령부 테일러 장군이 백선엽 장군에게 공로훈장을 수여

 

1953. 미2사단장 제임스 밴프리트 장군, 백선엽 참모총장, 8군사령관 맥스윌 테일러 장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

1953.05.XX.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3.07.13. 중공군 7.13 공세에 맞서 2군단을 지휘하여 화천발전소를 사수

1953.07.27. 휴전협정 체결, 유엔군∙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 간에 정전협정 체결하고 오전 10시 모든 전선서 전투를 중지
1954.02.14. 동양 최초의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나 초대 사령관에 임명됨

1955년 1군사령부 사령관 백선엽 대장과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

1957.05.18. 육군참모총장을 역임
1959.02.23. 연합참모본부 의장에 취임하여 최신식 무기 도입 등 한국군의 근대화에 공헌
1960.05.31. 퇴역
백선엽은 퇴임 후 1960년 7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중국·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캐나다의 대사로 활동하였고, 1969년 10월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서울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하였다

1969.10.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교통부 장관 임명장을 받는 백승엽 장군

1971년 충주비료 사장을 시작으로 호남비료·한국종합화학·한국에탄올·대한화학펄프 사장을 역임하는 등 1980년 3월까지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2013.08.29. 미 육군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을 미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

미8군 작전지휘소의 명칭을 '백선엽 지휘소'로 명명

미군은 백선엽 장군을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교' '최상의 야전 지휘관' '참모와 지휘관 모두 탁월'이라고 평가했다.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취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전입신고를 한다. 단순한 한미 동맹의 상징이 아니라 군의 작전가로서 존경한 것이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것은 책임감과 의지이다. 전투는 피아 지휘관이 벌이는 의지의 충돌인데, 누가 책임감이 강하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난다" <백선엽>

2010.09.28. 서울 수복 행사, 백선엽 장군과 이명박 대통령
2013.03.13.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
2018.11.21. 백선엽 장군의 99세 백수연에 인사를 하는 해리스 미국 대사
2018.11.22. 백선엽 장군과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참조

6.25 한국전쟁 일지

한국전쟁 유엔군 참전 일지

남로당의 생성과 소멸

 

▼출처

@뉴데일리 | 노장군 백선엽 대장을 변호함, 2017.08.03

@topclass | 대한민국을 지킨 참군인 백선엽 장군, 2017년 6월호

@조선일보 | 백선엽의 6.25 징비록, 2014.04.03

@잊을 수 없는 6.25전쟁 | 박윤식 저, 도서출판 휘선, 2012

@세계일보 | 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설은 사실무근, 2008.01.18

@온-나라정책연구 | 6.25전쟁 참전사, 2010

@국가기록원 | 6.25전쟁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