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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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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스토리아K 2020. 4. 10.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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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청년시절 대부분을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교육, 출판, 외교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방 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한미동맹을 주장하며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또한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과 정치발전, 교육발전의 기초가 되는 한국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승만 독립운동을 하다 /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수호하다 / 토지를 개혁하고 / 교육을 개혁하다 /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이승만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청일전기>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고,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1898.04.09.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하고 기자와 주필로 활동하다 

1898.03.10. 이승만은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자주독립을 역설하고, 총대위원에 선출되다
1898.08.10.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다

1899.01.09. 고종 폐위 음모에 연류되어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다

투옥된 독립협회 회원들, 이승만(맨왼쪽)

1904.02.08.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 집필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압제에 눌려 살다보니 우리 스스로 각성하지 못하였던 탓이다. 우리도 올바른 교육을 받고 지성과 자유를 깨닫으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 정신> 중에서

 

1904.11.04.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다

1905.08.04.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보전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다

1907.06.05. 조지워싱턴 대학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하다

1908.07.10.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덴버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다

1910.07.18.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

1910.10.10. 이승만은 유럽을 경유하여 5년 11개월 6일 만에 귀국하다

 

이승만은 귀국 후 YMCA 총무와 청년학교 학감에 취임하여 미국의 자유주의와 기독교 문명을청소년들에게 전파하면서 1911년에는 두 차례 전국 순회강연을 가졌다.

 

1912.03.26. 이승만은 105인 사건으로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다

1912.06.19. 은사인 우드로 윌슨(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을 만나 한국의 독립 지원을 호소하다

1913.02.08. 하와이 미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인 한인중앙학원 교장직을 맡다

1913.09.20.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를 창간하다

1914.07.29. 이승만은 호놀룰루에 한인여자학원을 설립하다

1917.10.29.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다

1918.12.01.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파리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다

1919.03.03. 장차 완전독립을 전제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하다

1919.03.17. 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되다,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1919.04.11.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추대되다. 내무총장에는 안창호를 추대되다

1919.04.14.~04.16.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거리행진을 하다, 필라델피아 시장 등 참석하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대회

1919.04.23.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에 추대되다

1919.04.23. 워싱턴DC에서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를 설치하다

1919.06.14. 대한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파리 평화회의 의장에게 한국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다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노령임시정부를 통합한 통합 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다.

1919.09.06. 이승만은 상해에서 통합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다

1919.09.19.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과 함께 1주일간 전체한인회의를 개최하다

1920.11.15. 임병직과 함께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2월 5일 상해에 도착하다

상하이 도착 이승만 환영식

1920.12.05. 이승만은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다

1920.12.28. 상해 임시정부청사에서 초대대통령에 취임하다

 

이동휘 중심의 한인공산주의 세력과 박용만 중심의 반임시정부 세력이 이승만 타도에 주력했고, 안창호는 흥사단을 중심으로 이승만과 경쟁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국무원들 간의 불신과 갈등, 독립운동에 대한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1921년 3월 이승만은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신내각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상해임시정부의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워싱턴군축회의(태평양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외교독립활동에 돌입하였다.

 

1921.05.29.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에 참석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다

1921.10.10.~12.01. 워싱턴 군축회의 미국대표단에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하다

이승만은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외교활동에 총력을 기울렸지만 한국의 문제를 의제로 올리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1921.07.14.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1925.03.11. 상해 임시의정원의 안창호파가 이승만을 탄핵 면책시키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1932.11.10.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파견하는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하다

1933.01.05. 이승만은 미국의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아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다

1933.02.16. 국제연맹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해 연설하다

1933.07.09.~07.20. 소련에 독립지원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했으나 퇴거당하다.

 

이승만은 국제연맹 조사단이 일본의 만주침공을 조사한 <리튼보고서>의 내용을 발췌하고 여기에 자신의 논평을 가한 <만주의 한국인들>을 발간하여 배포하였고 일본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이승만은 항일 외교를 통해 국제연맹이 <리튼보고서>를 채택(02.24)하고 이에 반발한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03.27)하도록 하는데에 기여하였다.

 

1939.12.10.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지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리다

1940.09.17. 임시정부는 중국 내 전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을 창설하다

1941.04.20. 호놀룰루에서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외교위원장에 임명되다

1941.06.04. 임시정부는 대미외교를 총괄하는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장에 임명하다

이승만은 일본 제국주의 실상을 비난하고 향후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는 책을 출판하였고,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이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1.08.01.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 출간하여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다

1941.12.07. 일본은 항공모함 6척으로 하와이 진주만 기습하다

1942.01.16. 임시정부 승인을 목표로 미국 명망가들과 한미협회를 결성하다

1942.02.27. 워싱턴DC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다

1942.03.23.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요청하다

 

1942.06.13.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을 통해 7월까지 매일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다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VOA 단파방송연설>

1942.08.29. 이승만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한국어 방송 시작하다

1943.02.17.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로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다

1943.03.30. 육군장관에게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다. 육군장관은 이승만에게 화답하다

1943.05.15. 이승만은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일본과의 싸움에 원조와 격려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다

1943.08.23. 제1차 퀘백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다

1943.12.01. 카이로 선언,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다

1944.08.21.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로 임정 승인을 촉구하다

1944.09.11. 루즈벨트와 처칠에게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내다

1944.10.25.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다

1945.05.12.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합의를 통한 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면 한국인들이 직접 자율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며 독립전취국민대회를 개최하다

1945.05.14. 얄타 회담에서 미국와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는 비밀협약을 주장하여 미 국무부와 충돌하다

1945.08.15. 일본은 무조건 항복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다, 일본의 항복으로 즉시 귀국하려 했으나 미 국무부의 방해로 2개월간 지연되다

1945.09.02. 일본 외무대신이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다

기독교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인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이러한 문제를 묵인해서는 안된다고 끊임없이 설득하였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수호하다

독립 이후 정치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 한국은 얄타 회담에서의 비공식 합의에 따라 38도선 북쪽은 공산주의 체제의 소련군이 남쪽은 자본주의 체제의 미군이 통치하였다.

 

1945.09.02. 맥아더는 북위 38선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발표하다 

1945.10.16.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이 주선해준 미군 비행기편(수송기)으로 귀국하다
1945.12.20. 이승만, 조선공산당과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발표하다

 

1946.03.20.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회의를 개최하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이승만과 김구

1946.05.23. 미군정청은 38선 무허가 월경을 금지하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철수를 결정하다(06.24)
1946.06.03. 이승만 정읍발언,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임시정부론을 제기하다
1946.09.06. 미군정은 사회교란 폭동음모 혐의로 조공 간부들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다, 박헌영은 월북하다

1946.09.23. 9월 총파업, 전평(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 투쟁, 15만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
1946.10.01. 10월 대구폭동, 박헌영 주도 9월 총파업에 연이어 일으킨 폭동으로 1천여 명 사망하다
1946.10.30. 화순탄광사건, 전평 소속의 탄광노동자 시위에 미군이 발포로 3명 사망하고 33명 부상하다
1946.11.23. 남조선노동당 결성,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통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다
1947.03.03.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에 취임(~1948.08.15)하다, 부주석은 김구

1947.03.22.  3.22 총파업, 남로당은 전국적으로 24시간 총파업을 일으키다
1947.09.21. 대동청년단 결성, 지청천 중심의 반공 청년 단체를 창설하다, 이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다

1948.01.03. 인민해방군 사건, 부산을 중심으로 좌익의 인민해방군에 의한 공산화를 기도한 관련자 400명을 체포하다 
1948.02.07. 남로당 폭동, 남한 단독선거 저지를 위해 전국적 파업과 폭동으로 100여 명 사망하다

 

1948.04.03. 제주 4.3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대(350명), 도내 11개 경찰서 등 습격하다

제주도에서 군경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승만

1948.05.10. 5.10 총선거·제헌 국회의원 선거, 유엔 감시하의 남한 총선거를 실시하다

1948.05.31. 제헌국회를 개원하여 임시의장에 이승만을 추대하다

1948.06.10. 국회법 국회통과, 초대국회의장 이승만, 부의장 신익희, 김동원 선출하다

1948.06.03.~07.17. 제헌국회는 헌법 제정, 대한민국 국호 채택(07.01), 대통령 중심제 선택하다

1948.07.17. 대한민국 헌법 공포,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존중하고 경제균등 실현하다

1948.07.20. 제1대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이승만은 192명 중 180표로 대통령에 당선되다

1948.07.24. 이승만은 73세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행정부를 구성하다(~8.4)

1948.08.02. 이승만은 광복군 출신이며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던 이범석을 총리로 인준하다

 

대한민국 건국 이념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개인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하는 민주공화국이 등장하다.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독립국가를 건국하다

1948.10.19. 여수순천반란 사건(~10.27), 여수 국군 제14연대 반란으로 경찰.국군.우익인사와 가족들을 처형하다

여순반란 사건

여수순천반란 사건이 진압되자 김지회, 홍순석의 지휘로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반군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유격투쟁이 본격화되었다.

 

1948.11.02. 대구 6연대 반란, 춘천 2개 대대 집단 월북(1949.05.04), 공군 조종사 2명 비행기 몰고 월북하다
1948.11.14. 무장한 북괴군 약 180명이 양양-오대산 지구로 침투하다 대부분 소탕되다
1948.12.01. 국가보안법 제정, 여순반란사건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1949년에 11만 명 이상 체포하다
1948.12.19. 이승만은 대동청년단 등 우익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창설하다

1949.01.20. 숙군사업 실시(~07.30) 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을 제거하다, 군 전체 5% 좌익 4,749명 숙청하다
1949.04.15. 해병대가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읍에서 창설되다
1949.04.22.~1960.05.30. 학도호국단 결성, 중.고.대학교 학생 전원 대상으로 유사시 향토방위 명분의 학생단체
1949.05.20.~08.16. 국회 프락치 사건, 제헌국회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공작원) 현역 국회의원 10여 명을 검거하다

지리산 빨치산들

1949.06.01. 인민 유격대 약 400명이 오대산으로 침투, 대부분 섬멸되다
1949.06.05. 국민보도연맹 조직,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한 반공단체 조직하다
1949.06.20. 서울 방어를 위한 수도경비사령부 창설하다
1949.06.30. 미군 남한 철수, 미국은 군사고문단 500여명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하다
1949.07.06. 인민 유격대 약 200명이 오대산까지 침투, 대부분 사살되다
1949.08.12. 철원지구 유격대가 선발대 15명을 용문산까지 남파, 실패하고 월북 도주하다
1949.08.15. 철원지구 본대 40여 명이 용문산까지 침투하다 20여 명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월북 도주하다
1949.08.17. 인민유격대 제1군단 약 360명을 태백산으로 남파하다 대부분 토벌되고 100여 명 도주하다
1949.09.14. 목포형무소 파옥사건(350여 명 탈출) 발생하다
1949.09.28. 인민유격대 50여 명이 양양군 금옥치리로 침투, 국군 8사단에 의해 섬멸되다
1949.10.01. 공군 창설, 미군으로부터 L-4 연락기 10대를 비롯하여 20대의 경비행기를 인도받아 창설하다

1949.10.17. 백두산함 배치, 미국 해군 퇴역 구잠함 USS PC-823 6만 달러에 구입하다

백두산함

1949.10.19. 정부는 南勞黨 등 民戰산하 133개 좌익 정당과 단체의 등록 취소하다
1949.11.06. 인민유격대 100여 명이 영일군 지경리로 해상 침투, 보현산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다
1949.12.24. 문경 양민 학살 사건, 공비 토벌 중 문경군 산북면 마을 주민 86명 사살하다
1950.01.12. 애치슨라인 발표, 미국무부 장관은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다
1950.01.26.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한국과 미국간의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다
1950.03.27. 위수령 제정, 국가 비상사태 등으로 군사시설 보호와 치안 유지를 위해 육군부대가 주둔하도록 명령하다
1950.03.27. 남로당 총책 김삼룡·이주하를 검거하다, 북한은 조만식과 교환을 제의하다
1950.03.28. 김상호와 김무현 부대 약 700명이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 토벌대가 소탕하다
1950.03.30. 김일성⋅스탈린 모스크바 극비회담에서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 봉기한다고 보고하다

 

김일성과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협의한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은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우회 차단하여 국군의 주력을 격멸한 다음 남한 내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에 의한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1950.06.25. 한국전쟁, 북한군 13만5천여명 탱크240여대, 폭격기200여대 동원하여 남침하다

1950.06.25. 국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동안 이승만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다

1950.06.26. 13시경 북한군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하고 서울 도심 진입을 시도하다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1950.06.26. 이승만은 맥아더에 도움을 요청하고, 장면 대사는 트루먼을 만나 한국 파병을 요청하다

1950.06.27. 이승만은 서울역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특별 열차에 탑승하다

6월27일 수원비행장, 이승만과 무초대사

1950.06.29. 이승만은 한국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달려온 맥아더와 수원비행장에서 만나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1950.07.12.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에게 맡기는 '대전협정' 체결하다
1950.08.01.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이전하다

1950.09.15.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사령관은 261척의 대규모 함대와 총병력 7만여 명이 인천에 상륙하다

1950.09.28. 서울 수복,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을 90일 만에 서울을 완전 수복하다
1950.09.30. 이승만은 전군에 38선 돌파 명령 하달하다
1950.10.10. 국군과 유엔군이 원산을 점령하다

1950.10.12. 이승만은 원산을 방문하여 장병을 격려하다

1950.10.19. 국군이 평양을 탈환, 대통령은 평양 방문(10.29)하여 연설하다(10.30)

이승만의 연설

1950.10.19. 중공군 참전, 총사령관 팽덕회의 중공군 총 18개 사단 26만 명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다

1950.11.11. 정부는 부역자처벌특조령을 공포하다
1950.12.04. 중공군 참전으로 평양에서 후퇴하고 서울에서 후퇴(12.04)하다

1950.12.15. 흥남철수작전(~12.24) 미 1해병사단 흥남으로 집결하여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하다

1951.01.04. 1·4 후퇴,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연합군은 경기도 안성까지 후퇴하다
1951.02.11. 거창양민학살사건, 국군이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 총살하다

1951.02. 제1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1951.03.15.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을 회복하다
1951.06.09. 정부는 통일없는 휴전협정 반대 성명을 내다

1951.0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는 휴전회담을 제의하나 이승만은 거부하다(06.25)

"우리 한국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산하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공산당 한 놈이라도 남겨둬서는 안 된다" <6.26전쟁 당시 육해공군총사령관 정일권의 회고록>


1951.09.06. 임시 수도 부산에서 여자의용군교육대가 정식 발촉하여 여군이 창설되다
1952.01.18.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독도를 한국 수역으로 선언하다
1952.01.20. 육군사관학교 개교,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정규 육사 1기생 입교하여 개교식을 하다
1952.02.18.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좌익계 폭동으로 69명이 사살되고 미국 1명 사망하다

1952.07.03. 제주도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2.07.23. 백선엽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다

1952.12.02.~12.05.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방한,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

경무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
1952.12. 수도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

1953.04.21. 국회는 북진통일 결의하고 정부는 미국 정부에 휴전 반대를 통보하다(05.08)
1953.06.08. 포로교환협정을 체결하고 포로를 교환하다(08.05~09.06)
1953.06.18.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 반공포로 3만5457명 중 2만6424명 일시적 석방하다

1953.07.13. 7∙13 공세, 휴전회담이 임박한 시점에 중공군의 기습적인 총공세로 양측이 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다
1953.07.27. 휴전협정, 유엔군 ∙ 조선인민군 ∙ 중국인민지원군 간에 정전협정 체결하다
1953.10.01.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다, 미국의 육해공군을 한국의 영토와 그 주변에 배치한다는 내용

1954.07.25. 이승만 대통령 방미(∼8.13),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미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다

브로드웨이의 카퍼레이드

토지를 개혁하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모든 토지를 국가로 귀속시키고 경작권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 농민은 소작료를 내는 대상이 지주에서 정권으로 바뀌었다.

1946.03.05.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토지개혁이 전격적으로 시행하다
1946.03.10. 북한 전역 11,500개의 농촌위원회 조직하고 토지개혁은 약 20일 만에 완료하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이 적용되는 지주들에게는 일괄적으로 국가가 유상몰수하는 대신 국가경제 발전사업 우선 참여 혜택을 내걸어서 농업과 토지에 묶인 돈은 산업발전으로 흘러가게 유도하였다.

1948.09.30. 이승만은 시정연설에서 농지개혁을 주장하다
1948.12.07.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에서 농지개혁을 주장하다
1948.12.07. 이승만은 "공산혁명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서울신문 보도
1948.12.10. 이승만은 "지주들에게 토지를 내놓게 하는 대신 그들이 상당한 자본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 주장하다
1949.01.04.~01.28. 농림부는 각 도청 소재지에서 공청회를 개최하다
1949.04.27. 농림부는 각 시·도에 농지개혁 지침을 시달하다 
1949.06.20. 정부는 농가 실태조사에 착수하다 

1949.06.21. 농지개혁법 공포, 자영농 육성과 농업생산력 증진을 위해 농지를 농민에게 유상분배하는 법안을 공포하다
1949.12.21. 농림부는 농가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다 
1950.02.03. 정부는 각 시·도에 농지소표 작성을 지시하다 
1950.03.10. 정부는 농지개혁법 개정 법령을 공포하다 
1950.03.14.~03.24. 농가별 분배 농지 일람표를 공람하다 
1950.03.25. 정부는 농지개혁법 시행령을 공포하다

1950.04.05.~04.15. 정부는 농민들에게 '분배농지 예정통지서'를 발급하다
1950.04.15. 정부는 농지개혁 완료를 발표하다, 광복 당시 자작농은 14.2%에서 농지개혁 후에는 80.7% 격변하다
1950.04.28. 정부는 농지개혁법 시행규칙을 공포하다
1950.05.27. 정부는 분배농지상환대장 작성을 지시하다

토지 소유의 조건은 소작료 30%를 5년 상환하면 토지는 농민의 소유가 되었고, 소작농이었던 167만여 가구가 자작농으로 변신하였다. 이승만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자유와 시장의 원리를 준용한 역사적 농지개혁이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우리가 밀고만 내려가면 남조선 곳곳에서 인민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민군이 남침했지만 남쪽에선 폭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은 토지개혁으로 내 땅을 갖게 해준 김일성을 위해 인민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지만 남한은 이승만의 토지개혁 덕분에 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

교육을 개혁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압제에 눌려 살다보니 우리 스스로 각성하지 못하였던 탓이다. 
우리도 올바른 교육을 받고 지성과 자유를 깨달으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 정신> 중에서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50달러 정도였고, 미국의 원조로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있을 시기에 이승만은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교육법을 입안하고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선포하였다.

 

1948.06.10.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다

1948.07.01. 국회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하다

1948.07.17. 헌법 공포, 헌법 제31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다

1948.07.17. 정부 수립과 함께 문화, 교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문교부(文敎部) 설립하다

1948.07.24.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하다

1948.11.04. 문교부 직제가 제정되어 1실 5국 22과로 재출발하다

1949.01. 문교부는 의무교육 6개년 계획(1949~1956년)을 수립하다

1950년대 입학식

1949.04.29. 대통령은 국정교과용도서편찬규정을 제정·공포하다

1949.12.31. 교육법 제정으로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다, 초등 취학률 47%(1943) > 99.8%(1960)

1950.04.29. 대통령은 교과용도서검인정규정을 제정·공포하다
1950.04.24. 문교부는 문맹퇴치 5개년 계획을 발표하다

1960년대 문맹퇴치 활동

1950.06.01. 초등학교 6년제 의무교육을 시행하다

 

이승만은 전쟁 중에 학제를 6-3-3-4제로 정비하고 지방에 국공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1952년에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가 설립되고 1953년에는 부산대, 충남대가 설립되었다.

 

1951.03.10. 교육법 개정으로 학제(6-3-3-4제)를 변경하다
1952.04.23. 교육법 시행령을 제정.공포하다


1953.06.04. 이승만은 대학 설립을 알리는 담화를 발표하다
1953.07.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수립하다

1954.10.06. 이승만은 미국의 MIT와 같은 공과대학을 목표로 인하공과대학교를 개교하다

인하대 개교 기념식에 참석한 이승만

1959년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에 우리나라 초등학교 취학률은 96.4% 달성하여 완전취학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고, 문맹률은 1948년 80%에서 1959년 22.1%로 낮아졌다.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하다

1948년 북한은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에 대한 보복으로 전력 공급을 전면 중단하였다. 전력과 석탄 등이 북에 편재되어 남한의 공업 시설은 마비가 되었고 화학 공업과 중공업 또한 북한에 편중되어 남북한 생산구조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였다. 농업은 남한의 경지 면적이 훨씬 넓었지만 화학비료 공급이 부족하여 극심한 곤란을 겪었다.

 

1948.05.14. 5.14 단전, 북한은 남한에 정치적 불만을 품고 전력 공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다

1948.07.24.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

1948.12.10. 한미경제원조협정 체결, 미국과 경제부흥을 위한 원조 협정을 체결하다

1949.04.08. 영암선 착공, 영주에서 태백 철암까지 연결하는 철도를 착공하다(1955.12.31. 개통)

1949.05.03. 함백선 착공, 중앙선 제천역에서 영월발전소를 연결하는 철도를 착공하다(1957.03.09. 개통)

1949.06.21. 농지개혁법안 공포, 모든 농지를 지주로부터 유상 수용하여 소작농에게 유상 분배하다

1949.12.19. 국채법 제정 및 최초 국채 발행, 재정수입 확보를 위한 국채 발행관련 규정을 마련하다

1950.06.02. 한일통상 및 재정협정 체결, 일본과 교역 증진

1950.06.04. 한일 무역협정 체결

1950.06.12. 한국은행 설립, 통화정책을 수립 및 집행하고 물가안정을 도모하다

1950.12.01. 유엔총회는 한국재건단설치안 가결하고 발족하다(1951.01.03)

1951.03.05. 정부는 120만 소작인에 농지분배를 발표하다

1952.01.18. 평화선 선포,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경계선으로 표시하여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인을 받다

1952.05.24. 한·미경제조정협정(마이어협정)조인, 한국 전쟁으로 인한 경제문제를 조정,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설치하다

1952.12.14. 한미 경제협력 체결

1953.02.15. 제1차 통화개혁(긴급통화조치),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다

1953.03.08. 정부는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동위원회법 공포하다

1953.04.04. 이승만은 내각에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리다

1953.05.10. 근로기준법 공포,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하고 이를 준수하도록 법률로 정하다

1953.06.10. 대한중공업공사 설립, 전후 시설 복구에 필요한 철강재를 생산하다, 현재의 현대제철로 성장하다

1953년 당시 대한중공업공사

1953.12.14. 경제재건과 재정안정 계획에 관한 협약, 미국의 대한 원조 운영 프로그램

1954.04.03. 한국산업은행 설립, 경제재건과 부흥을 위한 장기자금 조달과 지원을 담당하다

1955.04.15. 정부는 100만호 주택건축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다

1955.05.31. 한미 석유협정과 한미 잉여농산물 원조협정 체결하다

1955.08.15. 경부선 특급열차인 통일호를 운행하다

1955.08.26.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와 세계은행(IBRD)에 가입하다

1955.09.01. 전국인구조사 실시

1956.02.27. 정부는 경제부흥 5개년계획을 수립하다

1956.03.03. 대한증권거래소 출범하다

1956.03.15. 서울 당인리화력발전소 3호기(25MW) 준공하다

1956.04.15. 영남지역 전력공급을 위한 마산화력발전소(50MW)를 준공하다(착공. 1954.10.15)

1956.05.25. 강원지역에 매장된 저열탄무연탄을 주연료로 사용하는 삼척화력발전소를 준공하다

1956.08.31. 상공부는 수출 5개년계획을 수립하다

1956.09.30. 한일관계 개선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재산권 청구 철회를 일본에 요구하다

1956.11.28. 한미우호통상조약 체결, 전문 25개조, 발효(1957.11.07)

1956.12.17.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

1957.04.28. 자주적인 전원사업을 위해 괴산수력발전소(2.6MW) 준공하다

1957.04.28. 단양석회비료공장 준공

1957.05.05. 어린이헌장 선포

 

이승만은 유엔한국재건위원회(UNKRA)를 설득해 문경에 시멘트 공장,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건설했고, 미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대규모 비료공장인 충주비료공장을 건설하였다.

 

1957.09.26. 해외원조를 받아서 한국 최초의 시멘트 공장인 문경시멘트공장을 준공하다

1957.09.30. 한국 최초의 인천판유리공장을 준공하고 한국 원료와 기술로 판유리를 생산하다

인천판유리공장

1958.03.11. 원자력법 공포, 미국과 영국, 일본 등 토대로 법률 전문가 자문을 받아 원자력법을 제정하다

1958.04.01. 농업은행 발족, 농업계 특수은행으로 1961년에 농협이 되다

1958.11.20. 농업협동조합중앙회 발족

1959.02.03.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설립, 국립연구소

1959.08.31. 식량 증산을 위해 충주시에 충주비료공장을 준공하다

충주비료공장

1960.02.13. 한미투자보장협정 체결, 미국인의 한국에 대한 투자를 미국 정부가 보증하다

1960.04.28. 이승만 대통령 하야

원자력의 기반을 만들다

아이젠하워는 원자력을 "인간이 갖고 있는 위대한 창의력을 죽음이 아닌 삶을 창조하는 물질을 만드는데 바치겠다"고 전 세계에 약속했다. 원자력을 무기가 아닌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56년 대통령 과학고문인 워커 리 시슬러 박사를 한국에서 만났다. 시슬러는 "우라늄 1그램으로 석탄 3톤의 에너지를 낼 수 있다" "석탄이 땅에서 삽으로 캐는 연료라면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라고 말했다.

시슬러 박사와의 만남으로 이승만은 원자력이 한국의 주요 에너지원이 될 것으로 학신하고 원자력 기술의 도입을 결정했다.

 

1953.12.08.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 연설하다

1955.08.08. 스위스 제네바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 3명이 참석하다

1956.02.03. 한미 원자력협정, 원자력 비군사적 사용에 관한 한미 협력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다 

1956.03.09. 이승만 정부는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 관련 행정부서인 '원자력과'를 신설하다

1957.08.08. 한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 회원국이 되다

1958.03.11. 원자력법 공포, 미국과 영국, 일본 등 토대로 법률 전문가 자문을 받아 원자력법을 제정하다

1958.10.01. 원자력원 구성, 대통령 직속 기관의 행정기구를 만들다

1958.10.28. 이승만은 원자력 연구를 지시하다

1959.02.03.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설립하고 273명의 학생을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다

원자력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1958년 한양대, 1959년 서울대에서 원자력공학과가 문을 열었다.

1959.07.14. 이승만 정부는 서울 공릉동에서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II를 도입하다

1962.03.19. 원자력연구소 원자로 TRIGA Mark-II 처음으로 점화하다

1963.12.17.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 방사선의학연구소 출범하다

1968.01.05. 박정희 정부는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원전 건설사업을 착수하다

1969.04.18. 고출력의 연구용 원자로 TRIGA Mark-III을 기공하다

1971.03.19. 국내 최초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를 기공하여 상업운전을 시작하다(1978.04.29)

1971.05.07. 정부는 신장기에너지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계획하다

부산 기장군에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고리 2~4호기, 경북 경주시에 월성 1~4호기, 전남 영광군에 한빛 1~6호기, 경북 울진에 한울 1~6호기 가동하다

1996.01.01. 한국 표준형 원전 OPR1000(1000MW) 원자로계통 설계에 성공하여 국내 원전 12기에 적용하다

1998.08.11. 한울 3호기에 한국 표준형 원전 OPR1000을 처음으로 적용하다

2002.04. 한국 신형 원자로 APR-1400(1400MW) 설계 인가를 획득하고 2006년 8월 신고리 3,4호기에 첫 적용하다

2009.12.27. 400억 달러 규모의 아랍에미리트원전(APR-1400, 1.4GW급 원전 4기) 수출을 계약하다

2011.02.28. 신고리1호기 가동, 부산시 기장군에 가압경수로(OPR-1000) 가동하다

2014.08.14. 차세대 신형원전 APR+(1500만 KW급) 개발하고, 원전 표준설계인가 취득하다

2017.06.19. 문재인 탈원전 선언, 신규 원전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하고 원전정책을 재검토하다

2017.12.06. 영국이 무어사이드 원전(원자로 3기, 3GW, 21조 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나 정부의 탈원전 영향으로 우선협상자 지위를 상실하다(2018.07.31)

2019.04.30.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한국형 원전이 세계 최고 안전성 인증을 획득하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다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미국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려는 무리한 선거 전략 등으로 이승만은 하야했다.  

1956.08.15. 우남 이승만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1959.03. 최인규는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후 부정선거를 총지휘하다, 정부 내에서 6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유당에서는 기획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부정선거가 이루어 지다
1959.11.18. 통일당은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대통령을 부통령 후보에 김준연 당 위원장을 지명하다
1959.11.26.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구파의 조병옥 박사를 부통령 후보를 신파의 장면 박사를 선출하다
1960.02.15. 조병옥 후보는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두고 미국에서 지병으로 사망하다
1960.03.14.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다

1960.03.15. 3.15 부정선거, 자유당은 선거 조작과 개표 조작으로 불법선거를 자행하다
1960.03.15. 민주당은 3.15 선거는 불법이고 무효임을 선언하고,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80여 명이 사상하다, 법질서는 상실되었고 군중이 마산을 지배하다

1960.03.18. 국회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다

1960.04.11.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시신이 발견되자 시위는 더욱 격화되다

1960.04.19. 4.19 의거, 서울시내 학생 총궐기로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로 100여 명 희생되고 데모는 전국으로 확대되다


1960.04.19. 비상계엄령 선포(~07.16) 4.19 의거로 서울시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다

 

1960년 5월 23일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은 이승만은 이들을 얼싸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일주일 만인 4월 26일 자진 하야한 그는 대만 장제스 총통의 위로 편지에 "나는 위로받을 이유가 한 가지도 없소. 불의를 보고 일어서는 똑똑한 젊은이들과 국민을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라고 답했다. <이승만 현대사> 390쪽


1960.04.25. 서울 대학교수단은 시국수습선언문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다

1960.04.26.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하다
1960.04.26. 국회는 시국수습결의안(이승만 대통령하야·재선거·내각책임제 개헌)을 채택하다
1960.04.26. 李承晩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고 허정 외무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다

1960.04.27.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직을 사퇴하다


부상 당한 학생들을 위문하면서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젊은이들이 장하다" 말하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다"라는 말을 남기고 실제로 하야를 결행하다


1960.04.28. 부통령 이기붕 일가 자살하다
1960.05.03.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부정선거 총괄 지휘한 혐의로 구속되다
1960.05.29.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하다

1961.12.21. 최인규는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형무소에서 교수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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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정신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대통령 이승만 담화집> 중에서

 

공산주의는 실패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승만

- 첫째, 재산을 나누면 근로의욕이 꺾인다.

- 둘째,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메마른다.

- 셋째, 지식인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우매해진다.

- 넷째,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타락한다.

- 다섯째, 소련을 [조국]으로 믿으면 배반당한다.

 

▶ 출처

중앙일보 | 농지개혁...땅 갖게 된 농민 '대한민국 국민' 정체성도 갖게 돼,2008.08.27

자유아시아방송 | 6.25전쟁과 이승만의 토지개혁, 2014.06.20

뉴데일리 | 이승만 시대, 대대적인 교육혁명, 2014.02.03

오늘의 한국 | 외교 중시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2015.03.03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 | 초대 대통령 건국대통령 이승만 연보알기
월간조선 |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 2006.03

한인 역사박물관 | 미주이민 100년 역사

이승만의 분노 | 전광훈 저, 퓨리탄, 2016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