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공산당이 조직되었고, 이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연계하기 위한 국제적 조직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립되다.
1917.11.07. 러시아 10월혁명,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고 레닌이 수상이 되다
1918.05.11.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조선사회주의당이 되다
1919.03.02. 코민테른 설립, 러시아 공산당 주도 인물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설립하다, 각국 공산당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이다
1919.09.05.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이 창당되어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지부로 공식화하다
1920년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은 연해주, 시베리아의 해외 한인들과 일본 유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고 이를 국내에 유포하면서 좌파세력이 태동하다.
1921.05.04. 한인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05.17)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결성하다
1922.12.30.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탄생하여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되다
1923.01.17.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공산당 중앙총국을 발족하다
1924.01.21. 소련의 초대 지도자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등장하다
조봉암은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신의주 사건으로 고려청년회 대표인 박헌영이 조봉암에 보내는 비밀문서에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드러나면서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다
1925.04.17. 조선공산당 창당,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조선공산당을 비밀 조직하고 초대 책임 비서로 김재봉을 선출하다
1925.04.18.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비밀리에 공산주의 청년 동맹을 조직하다
1925.11.22. 조선공산당은 신의주사건으로 당 중앙집행위원회 대부분을 포함하여 약 30여명의 지도부가 체포되다
1926.06.10. 조선공산당은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민중봉기를 계획하나 사전에 발각되어 100여 명의 당원이 체포되다
1939.05. 경성콤그룹, 박헌영 김삼룡 이현상 등이 경성부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다
1940.09.17. 중화민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을 결성하다, 총사령관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임명하다
1945.08.08. 소련은 대일본 참전을 선언하고 선봉군이 두만강 건너 웅기군 나진 청진을 차례로 점령하다(~08.15)
1944.08.10. 조선건국동맹 결성, 여운형 등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패망과 조선 해방에 대비하여 비밀 단체를 결성하다
1945.08.15. 일본 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종결칙서를 방송하다
1945.08.15. 건국준비위원회 결성(~09.07) 여운형은 해방 당일에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해 조직을 결성하다
1945.08.20. 8월 테제 발표, 박헌영은 사회주의 혁명을 마르크스 전통이론에 따른다는 테제를 발표하다
1945.08.20. 경성콤그룹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건준) 발족하다, 박헌영 김삼룡 이현상 이주하 등 참여
1945.08.26.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여 군정사령부를 설치하다
1945.09.04. 건준 2차 개편에 박헌영계의 재건파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을 장악하다
1945.09.06.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선포, 여운형 등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인공 수립을 선포하다
1945.09.11. 조선공산당(조공)을 합법적 공산주의 정당으로 재건하고 박헌영을 최고지도자로 김일성을 2인자로 추대하다
1945.09.19.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 원산항 입항, 소련군 88특별정찰여단 소속 대위 김일성 등 소련 국적의 한국인 80여명이 원산항에 상륙하다, 김일성 일행 평양 입성(09.21)
1945.09.20. 스탈린은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극비 지령을 하달하다
1945.09.25. 8월 테제를 보완한 9월 문건은 조선공산당의 혁명 노선을 제시하다
1945.10.10.~10.13. 김일성과 박헌영 회동하고,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개최하다
1945.10.13.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하고 분국 책임비서에 김용범, 김일성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다
1945.10.14. 소련군은 평양에서 조선인민해방 축하대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이 일반대중 앞에 처음 등장하다
1945.10.23.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평양의 북조선분국을 승인하다
1945.11.02. 신탁통치절대반대 선언,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이승만의 사회로 안재홍 여운형 박헌영 이갑성 등 참석하다
1945.11.05.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 결성, 허성택은 16개 산별노조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전국노동조합을 조직하고 1946년 10월 월북하여 1948년에 북한 내각 노동상이 되다
1945.11.12.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창당하고 박헌영과 결별하다
1945.11.23.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고 2진은 12월 3일에 귀국하다
1945.12.12. 미군정 하지 장군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으로 인정하다
1945.12.19. 서울운동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귀국환영 전국대회를 개최하다
1945.12.16.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영국·소련·중국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 채택하고 한반도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의하다(12.29)
1945.12.17.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은 분국의 책임비서에 취임하다
1945.12.20. 이승만은 조선공산당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발표하다
1946.01.31. 좌익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다
1946.02.08.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직(위원장 김일성)하고 북한은 인민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다
1946.02.11. 김일성은 평양에서 여운형 조선인민당 위원장과 회동을 가지다
1946.02.19.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의장단 여운형·박헌영·허헌·백남운 등
1946.05.15.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조공) 간부 등을 체포하고 전국 조공본부를 수색하다
1946.05.23. 미군정청은 38선 무허가 월경을 금지하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철수를 결정하다(06.24)
1946.06.03. 이승만 정읍발언,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임시정부론을 제기하다
1946.07.01.~07.10. 조선공산당 대표단 모스크바 회동에서 스탈린은 박헌영 김일성에 3당 합당을 지시하다
1946.07.16.~07.22. 박헌영은 5차로 김일성과 비밀회동을 가지다
1946.08.28.~08.30. 북조선로동당(북로당) 창립대회(1차 당대회),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 합당하고 북로당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김일성을 선출하다
1946.09.04. 3당 합동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다
1946.09.06. 미군정은 조공 간부들(박헌영, 이주하, 김상룡 등)에 대해 사회교란 폭동음모 혐의로 체포영장 발부하다
소련군정 최고 책임자인 스티코프의 일기에는 소련군정이 9월 총파업 당시에 두 차례에 걸쳐 파업의 투쟁 방향을 지시하고 투쟁기금 200만엔을 지급했고, 10월 대구폭동에는 투쟁 기금 300만엔 이상을 지원하고 조선공산당과 전평에 '투쟁방침'을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6.09.23. 9월 총파업, 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하여 15만 노동자가 참여하다
1946.09.29.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를 피해 남조선을 탈출하여 북조선에 도착하다(~10.06)
1946.10.01. 10월 대구폭동, 박헌영 주도 9월 총파업에 연이어 일으킨 폭동으로 1천여 명 사망, 3600여 명이 실종되다
1946.10.30. 화순탄광사건, 전평 소속의 탄광노동자 시위에 미군의 발포로 3명 사망하고 33명 부상하다
1946.10.31. 소련군정은 업무계획으로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한 보고서에 서명하다
1946.10.23. 소련군정 스티코프, 김일성, 박헌영 3자 회담에서 3당을 통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고 3당의 구성비율 등을 결정하다
1946.11.23.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결성,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통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다
1946.12.02. 남조선로동당 대회, 총 585명 참가하여 임시집행부 14명 선출하고 의장에 허헌을 선출하다
1946.12.07. 소련군정은 혁명자금 122만 루블을 박헌영에게 보내라고 지시하다
1946.12.19. 소련군정은 북조선 인민회의 수립부터 실행계획과 정당별 의석 배분, 구성인원 숫자까지 지시하다
1947.02.08. 북조선인민위원회 발족, 북한을 통치할 정식 정부로서 위원장은 김일성 선임
1947.03.22. 3.22 총파업, 남로당은 전국적으로 24시간 총파업을 일으키다, 김원봉은 전평의 총파업 배후로 체포되다
1947.08.11. 미군정은 좌익 단체에 대한 폐쇄령과 좌익 인물에 대한 일제 검거를 단행하다
1947.09.26. 소련의 스티코프가 미국과 소련 양군의 동시 철군 제안하다
1948.01.01. 강동정치학원 설립, 북한은 평안남도 강동군에 남로당 활동을 지원할 정치공작대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교육기관을 설립하다
1948.01.03. 인민해방군 사건, 부산을 중심으로 좌익의 인민해방군에 의한 공산화를 기도한 관련자 400명을 체포하다
1948.02.07. 2.7파업, 남로당이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파업과 폭동으로 100여 명이 사망하고 8500여명이 투옥되다
1948.02.08. 북한정권은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총 병력 6만과 탱크연대를 편성하다
1948년초에 남한이 단독정부 수립이 구체화되자 남로당은 대중동원을 통한 폭력투쟁을 전개하면서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한다. 1948년 2월말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제주읍·각면에 인민유격대 100명과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등 편성,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등 그 외는 죽창으로 무장하였다.
1948.03.25. 김일성과 김두봉은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해 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하다
1948.04.03. 제주 4.3 사건, 남로당 김달삼 등 무장대 350명이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 등을 내세우며 도내 11개 경찰서 등 습격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박헌영 이극로 등 남측 대표로 협상에 참가하고 김원봉은 연석회의에서 전체 사회를 맡고 인민공화당 대표 자격으로 축사하다, 그는 이후 북한에 체류하다
1948.04.19. 남북연석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북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대책을 논의하다
1948.04.29. 북조선인민회의는 소비에트헌법을 기초한 헌법초안 통과하다(04.24. 스탈린 승인)
1948.05.07.~05.11. 총선거 방해를 위한 좌익세력 공격으로 우익인사 40명 사망, 경찰지서 25개, 투표소 36개 습격하다
1948.05.10. 5.10 총선거·제헌 국회의원 선거, 유엔 감시하의 남한 총선거를 실시하다
1948.05.14. 5.14 단전, 북한은 남한에 정치적 불만을 품고 전력 공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다
4.3폭동 주동자 김달삼 등 6명은 북한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대 훈련을 받은 후 4차 유격대 대장으로 유격대원 300명을 이끌고 일월산 일대로 침투하여 경북 보현산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벌이다 강원도 정선에서 사망하다
1948.0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독립국가를 건국하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개인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개인의 재산권을 존중하는 민주공화국이 등장하다.
1948.08.21.~08.26. 김달삼은 황해도 해주에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다
1948.09.09.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내각에는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 홍명희, 국가검열상에 김원봉 등으로 구성하다
여수순천반란 사건이 진압되자 김지회, 홍순석의 지휘로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반군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유격투쟁이 본격화되었다.
대구 6연대 반란으로 팔공산에 집결했던 반란군은 태백산으로 이동하여 산간주민들을 납치하여 대원으로 훈련시켜 2백여명으로 부대를 형성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48.10.19. 여수순천반란 사건(~10.27), 여수 국군 제14연대 반란으로 경찰.국군.우익인사와 가족들을 처형하다
1948.11.02. 대구 6연대 반란, 연대본부에 침투한 좌익계 하사관들이 중심이되어 내부 반란을 일으키다
1948.11.14. 무장한 북괴군 약 180명이 양양-오대산 지구로 침투하다 대부분 소탕되다
1948.12.01. 국가보안법 제정, 여순반란사건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1949년에 11만 명 이상 체포하다
1948년 말 3500여명의 남로당원들이 월북해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 교육훈련을 받았다. 북한은 이들 중 젊은 당원들을 선발해 유격부대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한다.
인민 유격대는 1948년부터 약 1년 동안 10회에 걸쳐 남파되었고,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1950년 초부터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949.01.20. 숙군사업 실시(~07.30) 육군본부 정보국은 특별수사과를 설치하고 군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을 제거하다, 군 전체 5% 좌익 4,749명 숙청하다
1949.05.04. 춘천 지역 제 8연대 예하의 2개 대대제6사단 8연대 2개 대대 750명이 집단으로 월북하다
1949.05.12. 제2특무정대 기함 제508호가 월북하다
1949.05.20.~08.16. 국회 프락치 사건, 제헌국회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공작원) 현역 국회의원 10여 명을 검거하다
1949년 6월에 남로당과 북로당이 조선로동당으로 통합되고 남한에서의 게릴라 활동은 김일성 정권이 직접 운용하였고, 9월에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북한은 10회에 걸쳐 2345명의 인민유격대를 남파한다
1949.06.01. 인민유격대 약 400명이 오대산으로 침투하다 대부분 사살되다
1949.06.25.~06.28.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를 개최하다
1949.06.30. 미군 남한 철수, 미국은 군사고문단 500여명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하다
1949.06.30. 조선로동당 창립, 북조선노동당이 남조선노동당을 흡수하여 조선로동당으로 변경하고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박헌영을 선출하다
1949.07.06. 인민유격대 약 200명이 오대산까지 침투, 대부분 사살되다
1949.08.04. 김달삼 부대 약 300명이 경북 영양의 일월산으로 침투하나 대부분 토벌되다
1949.08.12. 철원지구 유격대가 선발대 15명을 용문산까지 남파, 실패하고 월북 도주하다
1949.08.15. 철원지구 본대 40여 명이 용문산까지 침투하다 20여 명이 사살되고 나머지는 월북 도주하다
1949.08.17. 인민유격대 제1군단 약 360명을 태백산으로 남파하다 대부분 토벌되고 100여 명 도주하다
1949.09.14. 목포형무소 집단탈옥사건, 제주 4.3사건 관련 죄수 413명이 탈출하여 298명이 사살되다
1949.09.22. 1900톤급 전 미해군 함정 킴볼스미스호가 월북하다
1949.09.24. 공군조종사 2명이 L-5 정찰기를 타고 월북하다
1949.09.28. 인민유격대 50여 명이 양양군 금옥치리로 침투하려다 국군 8사단에 의해 섬멸되다
1949.09.28.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창설
1949.10.19. 정부는 남로당 등 민전 산하 133개 좌익 정당 및 단체의 등록을 취소하다
1949.11.06. 인민유격대 100여 명이 영일군 지경리로 해상 침투하여 보현산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다
1949.12.24. 문경 양민 학살 사건, 국군은 공비 토벌 중 문경군 산북면 마을 주민 86명 사살하다
1950.01.17.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8선을 돌파하겠다는 남침 계획을 건의하다
1950.03.27. 남로당 총책 김삼룡 이주하를 검거하다, 북한은 조만식과 교환을 제의했으나 이승만의 교환조건을 거부하다
1950.03.28. 김상호와 김무현 부대 약 700명이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 토벌대가 소탕하다
1950년 4월에 김일성은 박헌영과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방문하여 북한의 남침을 허락받았고, 5월에 북경으로 건너가 모택동의 동의를 받았다. 북한 김일성의 발의와 소련 스탈린의 승인과 중국 모택동의 참여로 남침을 위한 국제적 동맹을 구축하였다.
1950.03.20. 김달삼은 정선군 삼운리에서 국군 제185부대 수색대에 발견되어 치열한 전투끝에 지경리에서 사망하다
1950.03.30.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스크바 극비회담에서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 봉기한다고 보고하다
1950.04.05. 김일성과 박헌영은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방문하여 스탈린과 남침을 협의하다
1950.04.10.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허락하고, 중국의 모택동의 동의를 얻으라고 지시하다
1950.04.30. 소련의 스탈린은 대남공격을 승인하다, 모택동은 5월 14일에 승인하다
1950.05.13.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경으로 건너가 모택동의 동의를 받다
1950.05.15. 성시백은 신문사를 경영하며 취재를 이유로 정부와 군기관의 기밀정보를 북한에 넘기는 등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간첩죄로 처형되다(06.27) 북한은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부여하다
1950.05.29. 북한은 8월 15일까지 서울에 통일 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남침 공격의 작전계획을 완성하다
1949년 7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과 제164사단은 북한으로 들어가 각각 조선인민군 제6사단과 제5사단으로 개편하고 한국전쟁 직전에 제 6사단은 개성과 옹진에 제 5사단은 양양에 배치되었다.
1950.06.07. 북한은 남침 계획을 완성하고 방송을 통해 평화적 조국통일 호소문을 발표하다
1950.06.16.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최종 동의를 받고 남침일자를 확정하다
1950.06.19. 북한은 방송을 통해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제안하다
1950.06.22. 북한은 각 사단장 앞으로 남침 전투명령 1호 하달하다
1950.06.23. 북한군은 전투배치를 완료하다, 북한군 제1군단은 금천에, 2군단은 화천에 군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 사단은 서부전선으로부터 제6, 1, 4, 3, 2, 12, 5사단 순으로 배치하다
북한의 남침공격 계획은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우회, 차단하여 국군의 주력을 격멸한 다음 남한 내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에 의한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남한 내 공산당원은 김일성과 박헌영 집단이 남침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50.06.25. 한국전쟁, 북한군 13만5천여명 탱크240여대, 폭격기200여대 동원하여 남침하다
1950.08.10. 이현상 부대는 경북 가창면 일대에서 미군통신부대를 습격해 미군 20여 명을 살상하고 통신시설을 파괴하다
1950.08.25. 이현상 부대는 경남 창녕에서 미군부대를 공격하여 미군 1백여 명을 살상하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격작전에 들어가자 경남북과 전남북의 4개 도당은 지하로 들어가면서 중요 시설을 관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키고 입산한 당원들로써 유격대를 조직했다. 호남지구에서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약 1만명의 인민군 병사들이 유격대에 합류했다.
1950.09.15. 인천상륙작전(~09.20) 유엔사령관 맥아더 지휘로 7만5천여명 병력과 261척 해군함정이 투입되다
1950.09.28. 경남지역 조선인민유격대는 함양군 휴천면에서 결성되어 낙동강 동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다
1950년 10월 공산유격대의 규모는 이북지역인 양구 평강 곡산 양덕 일대에 약 1만명, 38선 이남지역인 오대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 일대에 약 1만5천명이 활동했다. 남부군이 결성되면서 한국군은 전력의 상당부분을 호남과 지리산 일대에 묶어두었다.
1950.10.05. 북한은 조선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를 발족시켜 전남지역 유격대원을 총괄 지휘하도록 하다
1950.11.10.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남부군) 개편하다
1951.05.26. 이현상 부대는 충북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 좌익수들을 탈옥시키다
1951년 7월 이현상 부대는 강원도에서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충남 덕유산 기지에서 6개 도당회의를 열고 남부군 휘하에 각 도당 유격대 병력을 재편성했다.
1951년 11월 국군이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전북 남원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대대적인 겨울철 토벌작전을 전개하자 호남 일대의 유격대는 곧바로 붕괴위기에 빠졌다.
1952년 말에서 1953년 초 사이에 남한지역에 잔존해 있던 이현상 부대와 남도부 부대는 모두 국군에게 섬멸되었다. 북한에서 벌어진 남로당 계열에 대한 대규모 숙청작업으로 구 남로당 조직을 통한 조선노동당의 대남공작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빨치산은 북한정권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소모적 저항을 하며 소멸되었다.
1953.03. 박헌영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이 반당 종파분자로 몰려 대대적으로 숙청되다
1953.08.03. 남로당 세력은 평양에서 열린 최고재판소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다
1953.09.17.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총상을 입고 사망하다
1955.12.15.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미제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년 뒤 처형당하다
1963.11.12.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생포하여 빨치산 소탕을 완료하다
게릴라전의 목표는 공산주의 통일국가 수립이었고 게릴라전의 성패는 대중 호응과 대중 동원에 달려 있지만 남한에서의 게릴라전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이승만 정부가 게릴라전의 여지를 철저히 제거한 것이 중요한 억제요인으로 작용했다.
▶출처
☞한국 진보세력 연구 | 남시욱 저, 청미디어, 2018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북에 가서 6.25 남침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2019.06.14
☞펜앤드마이크 | 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뉴데일리 | 모두 소련지시-소련자금이었다, 총파업-대구폭동진실, 2011.06.02
☞논문 | 6.25전쟁 발발 전후 북한 게릴라의 활동과 성격,양영조, 2010
☞한국일보 | 야산대와 빨치산, 2000.06.12
☞올인코리아 | 6.25남침전쟁 10대 미스터리의 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