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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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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스토리아K 2020. 6. 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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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 시기에 거듭된 흉년에 도적떼가 마을을 약탈하고 탐관오리들과 양반의 횡포로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1885.03.06. 호남지방에서 화적발생 ▷진해에서 화적이 출현하여 현감의 인감과 신표를 탈취(11.22)

1886.02.18. 충청도 음성에서 화적이 발생하여 관아를 습격하고 민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

1860.04.05. 최제우 동학(천도교) 창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불안한 사회상 속에서 인권과 평등을 주장, 인내천(人乃天)

1862.02.04.(03.04) 임술민란, 세금 제도의 문란과 지배 계층의 횡포로 전국적으로 민란 발생

-단성민란(02.04), 진주민란(02.14)을 시작으로 함양⋅장수⋅영광(03.16), 능주⋅무주(03.29)

-군위⋅함창⋅밀양⋅평택⋅현풍(4월), 강진(05.12) 연산⋅진천⋅옥천(5월) 경주⋅신녕⋅연일⋅창녕(10월)

-부여⋅창녕⋅신녕⋅연일⋅경주(1월), 함양(03.16), 성주(03.26), 익산(03.27), 정읍⋅무주⋅무장⋅함양⋅능주⋅영광(03.31)

-울산(04.01), 선산(04.02), 개령(04.07), 인동(04.09), 함평(04.16), 평택⋅현풍⋅비안⋅군위⋅밀양(04.31)

-고산(05.04), 부안(05.08), 은진⋅공주⋅회덕(05.10), 금구(05.11), 거창(05.12), 장흥⋅청주(05.13), 문의⋅회인(05.14), 순천⋅상주(05.15), 임천(05.17), 진잠⋅옥천⋅연산⋅진천(05.31)

-청안(10.02), 함흥(10.24), 경기 광주(11.03), 창원(11.08), 황주(12.07), 남해(12.21), 제주(09.13, 10.06, 11.15)

1862.04.19.(05.17) 영의정 김좌근은 농민봉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남

1862.04.31. 신창과 온양에 화적이 출현하여 마을을 습격하고 재물을 탈취

1862.05.26.(06.22) 전국적인 농민항쟁 원인을 삼정의 문란으로 보고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

1862.08.31. 아산에 화적이 출현하여 마을을 습격

1863.06.08.(07.23) 최시형, 37세의 나이로 동학교단의 북접 대도주가 됨

1863.07.01.(08.14) 동학교주 최제우, 최시형에게 전위

1863.12.08.(01.16) 조선 25대 철종이 사망하자 흥선대원군 둘째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

1863.12.10.(01.18) 동학교주 최제우는 조선의 관군에게 체포 ▷03.10(04.15) 대구에서 참형(斬刑)당함

1864.03.10.(04.15) 동학 창시자 수운 최재우, 대구에서 처형당함

1866.07.12.(08.21) 제너럴셔먼호 사건(~09.04) 미국 상선이 평양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선원들이 처형됨

1866.09.18.(10.06) 병인양요(~11.12) 프랑스 군함 7척 군인 2천여 명이 강화도 점령

1871.03.11.(04.30) 이필제의 난, 동학 조직을 이용해서 교조 신원을 요구하며 영해 관아를 습격

1871.04.14.(06.01) 신미양요(~06.11) 미국 군함 5척과 군인 1,200여 명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전쟁이 발발

1871.08.02.(09.16) 이필제는 조령에서 체포(08.02)되어 처형됨(12.24)

1871.06.01.(04.14) 신미양요(~06.11) 군함 5척, 군인 1,200여 명, 조선군 243명 전사

1873.11.14. 최익현 상소로 대원군 물러남

1875.09.21. 운요호 사건, 일본 군함이 조선 개방을 위한 강화도 무력시위, 조선군 35명 전사

1876.02.03.(02.27) 강화도 조약,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 체결, 부산·인천·원산항 개항, 치외법권 인정 등

1881.05.19.(06.15) 별기군 창설, 일본 공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 교관이 훈련시키는 신식군대(80명)

1882.06.09.(07.23) 임오군란,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이 창덕궁을 습격하고 민비는 장호원으로 피신

1882.08.10. 청나라, 정여창의 함선 3척과 병력 4~500명 제물포에 도착

1882.08.12. 일본, 군함4척과 보병 대대 병력 300명 제물포에 상륙

1882.08.20.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이 회군 3000명으로 남양만(경기 화성)에 상륙

1882.07.17.(08.30) 제물포조약, 사망한 왜인의 배상금 오만원, 군비 오십만 원을 배상하고, 일본군의 서울 주둔을 허락

1884.10.17.(12.04) 갑신정변,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키려다 청의 군대 개입으로 실패

1884.11.24.(01.09) 한성조약, 조선과 일본의 갑신정변 사후 처리 및 보상에 대한 체결

1885.03.04.(04.18) 톈진조약, 갑신정변 실패로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동북아시아 세력 균형을 위해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이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호 통지한다는 내용 포함

1888. 민란의 전국적 확산, 함경도 길주에서 민란, 북청민란(6월)

1889.09.24.(10.18) 방곡령 선포,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식량난 해소를 위해 식량 추출 금지

 

전봉준은 몰락한 양반으로 동학 접주와 지관, 장사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는 탐관오리들이 들끓고 외세의 침탈과 왕가의 권력쟁탈로 조정은 어수선하였고 1890년대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에 의해 고부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0. 이용구 동학에 입교하여 손병희와 함께 최시형의 고제(제자 중 학식과 품행이 뛰어남)가 됨

1892.12.06. 전봉준 동학 입도

1892.10.27. 최시형 삼례집회 개최

1893.01.10. 전봉준, 창의문(倡義文) 작성 및 배포

1893.01.23.(03.11) 동학교도 2만여명이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서 척왜척양의 기치를 들고 농성

1893.02.12.(03.29) 동학교도 박광호, 손병희 등이 광화문에서 교조의 신원을 주장하며 복합상소

1893.02.13. 국왕의 '해산요구' 교지 하달

1893.02.14.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해산, 하향

1893.02.26.(04.12) 복합상소 주동자에 대한 체포령 발령

1893.03.10.(04.25) 최시형 보은집회 개최 ▷농민군 동학본부가 있는 충청도 보은으로 집결

1893.03.11.(04.26) 동학교도 2만여 명 집결, 금구 원평에도 집회, 최시형은 보은 총집결 지시

1893.03.20. 금구 집회, 전봉준 동학 남접 중심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교조신원운동

1893.03.22. 동학교도들, 보은⋅상주 수령에게 군량과 군기를 요청, 보은 군수는 집회 해산을 요청

1893.03.26. 동학농민군 3백여 명 보은 도착

1893.04.01. 국왕의 두번째 효유에 보은집회 해산 결정

1893.04.03. 보은집회 해산

1893.04.05. 어윤중이 금구집회의 동학교도들을 설득하여 해산

1893. 전국 65곳에서 민란 발생, 보은 집회

1893.11. 전봉준 등 22명은 고부에서 사발통문을 작성

1893.11.30.(01.06) 조병갑 익산군수로 발령

고부군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병갑은 익산군수로 발령이 났고, 고부군수로 새로 발령난 인물들은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임을 하였다. 조병갑은 전라감사 김문현을 통해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였다.

1894.01.09.(02.14) 조병갑 고부군수로 재부임

 

1894.01.10. 동학농민운동(~1895.03.29)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한 무장 봉기, 농민 수탈과 농촌 경제 파탄으로 '반봉건' 목적

1894.01.10.(02.15) 고부 봉기, 전봉준은 고부농민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세미를 빈농에게 나누어줌

1894.02.15.(03.21) 동학 농민군, 백산 봉기하여 4대 강령 발표

1894.02.29.(04.04) 농민군, 금구.부안의 관아를 점령

1894.03.20.(04.25) 무장 봉기, 전봉준은 무장에서 1차 기병, 창의문 선포

 

태인 접주 김개남, 무장 접주 손화중, 금구 접주 김덕명, 차치구를 장령으로 삼아 거병을 선언한 전봉준은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고부 관아를 공격,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전곡을 나눠주고 악정을 알삼던 아전 등을 처단 또는 가뒀다.

 

1894.03.23.(04.28) 농민군, 고부를 재점령, 부안 점령(05.08)

1894.03.25.(04.30) 농민군 1차(백산) 봉기 ▷전봉준 대장으로 추대 농민군 4대 행동강령 선포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 설치

1894.04.02.(05.06) 전라감영군 백산으로 출동

1894.04.04.(05.08) 농민군, 부안.금구 등을 점령하고 법성포 등지에서 궐기를 호소 양호초도사 홍계훈이 경군 800명을 이끌고 인천항 출발

1894.04.07.(05.11) 황토현 전투, 농민군이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감영군을 격파하여 조선 조정이 충격에 빠짐

1894.04.08.(05.12) 농민군 흥덕.고창 점령, 무장 점령(04.09), 영광 점령(04.12), 함평 점령(04.16)

1894.04.18.(05.22) 홍계훈 경군은 전주성 출발하여 영광 도착(04.21)

1894.04.19.(05.23) 농민군, 함평에서 8개 조항을 내걸고 폐정개혁을 요구

1894.04.21.(05.25) 전봉군 농민군, 나주와 장성으로 진격

1894.04.23.(05.27) 황룡촌 전투, 농민군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京軍)을 격파

1894.04.25.(05.29) 농민군 정읍, 태인, 원평 점령 ▷원평에서 왕이 보낸 사자를 처단

1894.04.27.(05.31) 농민군 전주성 점령, 3명여 농민군이 장날 장꾼들 틈에 섞여 전주성에 들어가 순식간에 성을 점령

전주성(전북도민일보)

조정은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고 동시에 톈진조약을 핑계로 일본군도 상륙한다.

 

1894.04.30.(06.03)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국에 원병을 요청

1894.05.02.(06.06) 청군 제독 엽지초가 청군 1500명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 청나라 군대를 2,560여 명을 조선에 파병

1894.05.04.(06.07) 조정은 고부민란 책임을 물어 조병갑을 파직하고 강진 고금도에 유배

1894.05.04.(06.07) 청나라 조정은 텐진조약(1885)에 따라 일본 정부에 파병을 통보

1894.05.05.(06.08) 청군 선발대 910명이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

1894.05.06.(06.09) 일본군, 군함 3척에 4,500명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 420명의 일본군이 서울로 진입

1894.05.07.(06.10) 전주화약,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 간에 화약을 체결하고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

집강소

 

동학농민군이 해산해서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 청일 양국 군대는 충청도 아산과 인천에 머물러 있으면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청은 일본에 공동철병을 제의하였지만 일본은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다.

 

1894.05.07.(06.10) 오토리 일본공사가 일본해병 300명을 이끌고 경성에 귀임

1894.05.08.(06.11) 농민군 전주성에서 철수, 각지로 돌아가 도회소(지도본부) 설치 시작

1894.05.08.(06.11) 농민군은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농민은 철수, 조선은 청국과 일본에 철병 요구

1894.05.13.(06.16) 일본군, 보병 3,000명과 기병 300명이 인천에 상륙

1894.05.19.(06.22) 일본군 혼성여단 주력부대는 서울에 침입하여 남산의 외성대에 6문의 포대를 설치

1894.05.23.(06.26) 일본공사, 국왕에게 내정개혁을 요구

1894.06.01.(07.03) 오토리 공사가 철병요구를 거부하고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안을 제시

1894.06.02.(07.04) 일본군은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정권을 수립

1894.06.11.(07.13) 교정청 설치, 동학 농민군이 철수하고 내정개혁을 위해 한시적으로 설치

1894.06.21.(07.23) 갑오변란,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 점령하고 고종을 연금하여 조선 관군의 무장을 해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1894.06.22.(07.24) 일제는 고종으로 하여금 정무와 곤무를 임시로 대원군에게 위임토록 조치

1894.06.23.(07.25) 청일전쟁(~1895.11.30)

1894.06.23.(07.25) 풍도 해전,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에서 청나라 군함 2척을 격침(청일전쟁 발발)

풍도해전 그림

1894.06.23.(07.25) 군국기무처 설치,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회의 총재관에 임명하고 중앙관제와 사회제도 개혁안을 의결 공포

1894.06.25.(07.27). 갑오개혁(~1895.05.14) 개화파에 의한 일본식 개혁, 군국기무처 설치, 경무청 신설, 노비제 폐지, 과거제 폐지, 고문·연좌제 금지

1894.06.25.(07.27) 김개남은 남원에 입성, 전봉준은 7월 2일에 남원으로 입성

1894.06.27.(07.29) 성환전투, 오시마 혼성 여단이 충남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평택과 아산으로 전투가 이어짐

성환전투 그림
아산전투 그림

1894.06.28.(07.30) 군국기무처, 중앙광제 개혁안 및 사회제도 개혁안을 의결 반포.

1894.06.30.(08.01) 일본, 청국에 대한 선전포고

 

대원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직후 섭정을 시작하면서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섭정을 시작한 대원군은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서장옥·서병학·장두재 등 주요한 동학접주들을 석방하였다.

 

1894.07.09.(08.09) 대원군과 밀의한 장두재는 김덕용·김개남·손화중에게 편지를 보내 봉기를 촉구

1894.07.09.(08.09) 전라도 부안의 농민군이 서천군으로 들어와 방포하며 총과 화약, 마구 등을 탈취

1894.07.15.(08.15) 농민군, 남원대회 개최 ▷제1차 김홍집 내각 성립

1894.07.25. 안동에서 서상철 의병 봉기(최초의 반일의병)

1894.07.26.(08.20)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요에 따라 조일공수동맹(朝日攻守同盟) 체결

 

세력을 가진 동학교도들은 양반과 향리들에게 억압받아 온 농민 집단으로서 한풀이하는 사건들을 벌이게 되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상전가나 지주가에 난입해서 과거사를 보복하는 사례는 지역별로 수없이 일어났다.

 

1894.07.26. 민보군 조직, 안동·의성 유림은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간 군대 조직

1894.08.02.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무장한 채 깃발을 앞세우고 감영이 있는 공주 부내로 들어와서 시위

1894.08.12. 천안에서 동학 교도들이 일본인 6명을 살해

1894.08.13.(09.12) 전봉준, 나주로 이동

1894.08.15.(09.14) 남영병(南營兵) 200명 상주·용궁·예천 파견.

1894.08.16.(09.15) 평양전투, 일본군은 3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09.16. 점령), 청군이 항복하고 일본군 평양성에 입성

평양에서 청군을 공격하는 일본군

1894.08.18.(09.17) 황해 해전, 황해도 해양도 부근 해상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와 일본의 함대의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제해권 확보하고 청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냄

청일해전 그림(국제신문)

1894.08.21.(09.20) 영남 북서부 13접주 회합. 산양 취회 농민군, 태봉병참부 일본군 대위 처형.

1894.08.25.(09.24) 김개남이 재봉기를 선언하자 전봉준이 남원으로 가서 만류함

1894.08.28.(09.27) 예천 읍내 공방전, 농민군 패배.

1894.08.29.(09.28) 일본군 충주주둔 공병대 석문리 기습.

1894.09.01.(09.29) 대접주 김인배가 광양·순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경상도 하동을 공격

 

1894년 7월에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자, 전주 화약 이후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을 추진하던 동학 농민군은 1894년 9월에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재봉기를 단행했다.

 

1894.09.04.(10.02) 전봉준은 전북 삼례에서 4천 명의 동학군을 모아 다시 봉기 ▷영월·평창·정선의 농민군 수천명이 강릉부 관아 점령.

1894.09.08.(10.06) 대원군측 밀사인 박동진과 정인덕 등이 전주로 내려와 봉기하여 상경할 것을 촉구하는 대원군의 밀교를 전봉준에게 전달

1894.09.08.(10.06) 전봉준·김개남, 2차 기병 결정(삼례집결)

1894.09.09.(10.07) 전라도 금구 농민군이 고산 관아를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쪽으로 진행

1894.09.10.(10.08) 삼례 봉기, 전봉준의 농민군이 재봉기 북상을 위하여 삼례로 집결.

1894.09.11.(10.09) 동학농민군 본격 봉기, 외세와 맞서 싸우기 위한 '반제·반일·반외세' 주된 목적

1894.09.13.(10.11) 남영병 120명을 선산·금산 파견.

1894.09.14.(10.12) 농민군 2차 봉기, 삼례에 모인 농민군 8백여 명이 전주성으로 쳐들어가 화포 74문, 탄환 9773발, 탄자 41,234개, 환도 300자루 등 무기를 탈취

1894.09.18.(10.16) 동학교주 최시형 봉기 쪽으로 선회, 남접 농민군과 연합하여 무장봉기를 선언.

1894.09.22.(10.20) 양호도순무영 설치(~12.27)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특별 지휘부 설치 ▷수천의 농민군이 상주·와 선산의 읍내 관아를 점령.

1894.09.24.(10.22) 농민군이 청주 읍성을 포위해서 공격

1894.09.26.(10.24) 손화중도 통문을 돌려 인근 농민군을 광주에 집결시켜 전봉준에 호응함

1894.09.28.(10.26)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대본영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1개대대 병력의 파견을 요청

1894.09.29.(10.27) 농민군, 진천 읍내를 포위하고 현감과 공형을 결박하고 무기고의 무기를 탈취

1894.10.01.(10.29) 농민군, 태안과 서산관아를 점령. 아산을 공격(10.05)

1894.10.06.(11.03) 농민군, 해주관아 점령. 충주와 괴산을 공격. 괴산 읍내를 점검

 

최시형은 북접농민군을 총지휘하는 총령으로 손병희를 지명하였다. 손병희의 북접농민군과 전봉준의 남접농민군이 논산에서 만남으로써 남북접 연합군이 이루어졌다.

 

1894.10.09.(11.06) 북접농민군은 강경에서 남접농민군과 합류 ▷농민군, 대전평(大田坪)에서 관군과 전투.

1894.10.10.(11.07) 경상도 농민군, 곤양과 진주(晉州)에서 일본군과 전투. ▷이규태는 교도중대와 통위영 2개 중대를 이끌고 서울을 출발하여 10월 24일 공주에 도착

1894.10.12.(11.09) 농민군 여산과 은진을 거쳐 강경포에 진출 ▷전봉준의 농민군이 북상을 시작하여 논산에 도착

1894.10.14.(11.11) 김개남(金開男) 부대 남원에서 출발하여 임실 도착.

1894.10.15.(11.12) 일본군 용산 출발 남하.

1894.10.20. 전봉준은 공주로 총공세를 명령

1894.10.21.(11.18) 대원군, 반일 쿠데타계획이 폭로되어 정권에서 물러남.

1894.10.22. 관군·포군이 홍천 서석 자작고개에서 치열한 접전, 농민군 1,000여명 희생.

1894.10.23.(11.20) 이인 전투, 공주성을 둘러싼 최초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취병산까지 후퇴

1894.10.23.~10.25. 충청도 공주·이인·효포에서 관군·농민군과 1차 접전, 농민군 논산으로 퇴각.

1894.10.26. 전봉준은 경천으로 철수, 논산으로 본진을 옮겨 전열 재정비.

1894.11.01. 천안 군수, 홍주의 농민군 토벌 요구로 일본군과 농민군이 홍주에서 전투 ▷일본군 청주전투

1894.11.02. 민보군은 강원 봉평에서 정해창·안영보·김순복 체포 ▷일본군, 홍주전투 후 갈산으로 진군

1894.11.03. 농민군, 옥천에 집결 ▷농민군, 충청 노성.논산.초포 등지에서 설진 ▷경군과 강릉부 민포군, 농민군 진압 ▷관군과 일본군, 공주에 주둔 방어 ▷농민군, 황해 풍천에서 일본인 살해

1894.11.04. 일본 봉산수비대, 해주로 행군 ▷일본 용산수비대, 개성에 도착

1894.11.05.(12.01) 평창군 후평에서 농민군 1만여 명이 일본군·관군과 접전. ▷일본군과 관군, 농민군 1만여 명과 전투로 농민군 백여 명 전사 ▷관군, 청산 석성리에서 농민군과 전투 ▷농민군, 평산 부근에서 양곡탈취

1894.11.06. 일본 용산수비대, 평산에서 농민군과 전투 ▷토벌군, 강원 정선·여랑의 농민군과 접전

1894.11.07. 일본군 장기간 주둔으로 조선 내정간섭 도모 ▷농민군 황해 낭천에 집합, 평산 공격 ▷정선의 농민군, 삼척 방면으로 도주

1894.11.08.(12.04) 농민군 공주로 진격하여 우금치에서 대공세를 펼쳤으나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여 후퇴. ▷일본 중로군, 옥천군 증약역전투에서 농민군 사살 ▷일본 서로군, 공주로 진군 농민군과 전투 ▷관군, 서산 매현의 농민군을 습격 ▷일본군, 청산에 도착 문암읍 민가 방화

1894.11.08. 농민군이 이인, 무넘이 고개를 공격하자 관군은 농민군에 쫓겨서 공주성으로 철수

1894.11.09. 농민군은 효포, 웅치, 우금치로 공주를 포위하고, 공주 진입의 요지인 우금치를 향해서 진격을 개시

1894.11.09.(12.05) 공주 우금치 전투(~11.14)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조선관군 연합군 전투에서 패배, 농민군 36,000명 전사하고 일본군 1명 전사

우금치 전투 민족기록화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 주력 대부분이 우금치의 좁은 골짜기로 공격해 오자 우세한 지형을 활용해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불리한 지형과 관군 및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해야만 했다.

1894.11.10. 일본 중로군, 금산에 도착하여 진산으로 진군(11.11)

1894.11.11.(12.07) 농민군 곰티에서 관군의 기습 공격당함, 노성으로 철수, 김개남 회덕 함락.

1894.11.12.(12.08) 일본 제19대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이 용산 출발 ▷한산·임천의 농민군과 전라도에서 건너온 농민군이 연합하여 한산 점령. ▷일본 용산수비대, 괴산부근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 ▷충주수비병은 괴산.보은.성주의 동학농민군 격퇴

1894.11.13.(12.09) 황해 신천의 동학농민군, 일본군과 신천진사 안태훈과 전투 일본 군로조사대는 김개남 부대와 청주 전투 ▷일본 중로군은 연산에서 전봉준 부대와 전투 ▷일본 서로군, 옥천에서 노성으로 진군 ▷농민군, 황해 취야장에서 일본군과 전투 끝에 퇴각 ▷나주 수성군과 손화중 농민군과 교전

1894.11.14.(12.10) 관군이 조림장터에서 동학농민군과 접전, ▷일본군은 농산 근처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 ▷일본 용산수비대, 옹진에서 농민군 격퇴 ▷동학농민군은 황해도 장수산성, 수양산성 함락 ▷김개남과 전봉준은 논산에서 합류 ▷민보군, 남원 부동촌의 동학농민군 공격 ▷일본군, 전라 용담에서 농민군과 전투 ▷일본 동로군, 강원도 평창에 도착

1894.11.15.(12.11) 정부·일본연합군과 노성에서 접전, 논산 황화대에서 정부·일본연합군과 접전, ▷농민군 전주로 철수 ▷농민군, 황해 강령에서 일본군과 접전, 옹진수영 급습

1894.11.16.(12.12) 일본군 진안읍에서 농민군과 접전

1894.11.17.(12.13) 공주에서 후퇴한 전봉준 부대와 청주에서 후퇴한 김개남 부대가 강경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흩어짐. ▷전라도 나주·영광·금구·태인·광주, 황해도 해주 등지에서 전투를 벌임 ▷관군, 황해도 농민군으로부터 조총 481자루, 화약 540근, 연환 2,300개 등 무기 회수 ▷농민군 황해 연안부 급습 ▷일본군 고산에서 농민군과 전투

1894.11.18.(12.14) 일본군, 전라 고산읍에서 농민군과 접전 ▷농민군, 나주 수성군과 전투 ▷일본군, 고산 농민군 화약제조소 습격

1894.11.19.(12.15) 최시형, 임실 갈담 장터에서 손병희를 만남, 손병희의 북접군과 다시 북상하기 시작함. 서천성 점령(11.20) ▷농민군, 황해 은율 공격 ▷전봉준, 전주 진입 ▷경기 송파진 부근에 500명의 동학농민군 집합 ▷안태훈의 민보군, 농민군 영장 3명 포살

1894.11.20.(12.16) 농민군, 전라 좌수사와 전투에서 패배 ▷농민군, 나주읍 포위

1894.11.21.(12.17) 여수 농민군, 전라 좌수영 재공격

1894.11.23.(12.19) 전봉준 전주성에서 출발, 원평으로 남하. ▷일본군, 해주 부근에서 농민군과 전투 ▷일본군과 관군, 황해 취야장에서 농민군과 전투

1894.11.24.(12.20) 나주 수성군, 전라 남산촌의 농민군 기습 ▷조정은 나주에 초토영(토벌본부)을 설치

1894.11.25.(12.21) 전봉준 휘하 농민군은 원평 구미란에서 정부·일본연합군과 접전에서 패함 ▷해주에서 농민군과 관군 접전. ▷츠쿠바함대의 육전대 87명, 좌수영에 상륙 ▷일본 서로군, 태인에서 전봉준 부대를 격퇴하고 농민군은 해산

1894.11.26.(12.22) 일본군, 해주 부근에서 농민군과 전투 ▷신임 황해감사, 재령부근에서 농민군에게 붙잡힘

1894.11.27.(12.23) 전봉준 농민군, 전라 태인에서 관군과 전투에서 대패 ▷농민군, 일본군.관군과 황해 해주에서 접전 ▷손화중 등 다시 광주 점령 ▷태인읍의 주산에서 농민군과 전투

1894.11.28.(12.24) 츠쿠바함대 육전대, 순천부 덕양에서 농민군과 전투 ▷관군이 태인읍에서 농민군을 토벌 ▷민보군, 남원성 수복

1894.11.29.(12.25) 전봉준, 입암산성으로 피신

1894.11.30.(12.26) 일본군, 전봉준 체포위해 입암산성 피습 ▷황해 은율지역 농민군, 장연관아 습격하여 군기 탈취

1894.12.01.(12.27) 손화중 휘하 농민군 해산, 김개남은 임병찬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 최경선 체포

1894.12.02.(12.28) 전봉준 체포,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

1894.12.03.(12.29) 전주 장대에서 김개남 처형

1894.12.05.(12.31) 전라도 남해안의 농민군이 장흥 관아 점령.

1894.12.07.(01.02) 전봉준 일본군에 의해 담양부로 압송.

1894.12.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1894.12.10.(01.05) 전라도 남해안의 농민군이 강진병영 습격, 점령.

1894.12.11.(01.06) 손화중은 고창 안현리에서 체포

1894.12.12.(01.07) 농민군, 청산에서 전투하였으나 패배. 농민군, 강원 영동 용산장터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

1894.12.18.(01.13) 북실(종곡)전투,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이 농민군 2,600여 명 살육.

1894.12.20.(01.15) 상주방어군(안동·예천·함창·용궁·개령 남영군) 1,000여 명 집결. ▷남영병 165명 김산·영동·보은 일대 파견.

1894.12.24. 충주 무극장터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짐, 최시형과 손병희 등 북접 지도자들 잠적

1895.01.18.(02.12) 정부 각 군현 민보군 해산령 내림.

1895.03.23.(04.17) 시모노세키 조약, 청이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 부속 도서를 일본에 할양, 배상금 2억냥을 일본에 지불, 항저우 등 4개 항구 개항

1895.03.29.(04.23) 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의 농민군 지도자 교수형.

1895.08.20.(10.08) 을미사변,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민비를 살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유길준 협력

1895.08.20.(10.08) 을미개혁(~1896.02.11) 친일 개화파 세력들이 내각을 구성하여 개혁을 주도.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단발령, 군제 개혁

1895.11.15.(12.30) 단발령 선포, 김홍집 내각이 공포한 고종의 칙령으로 유생들은 단발령을 신체적 박해로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임

 

1896.01.01. 태양력 사용, 고종의 칙령으로 태양력(그레고리력)을 사용함

1896.02.11. 아관파천(~1897.02.20)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1897.12.24. 손병희는 동학의 제3대 교주 역임

1898.07.21.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 처형

1901.03. 손병희, 이용구는 대한제국의 동학 탄압으로 일본으로 망명

1904.02.08. 러일전쟁(~1905.09.05) 한반도와 만주 패권을 놓고 일본과 러시아와 전쟁

1904.02.23. 한일의정서 체결

1904.04. 손병희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진보회(進步會)

1904.08.18. 손병준은 한성부에서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維新會) 조직, 일진회(一進會)로 개명(08.20)

1904.08.22. 제1차 한일협약 체결, 고문정치체제 확립

1904.09. 이용구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를 조직, 손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통합

1904.09.18. 일진회는 '문명화 및 일한일체화에 대한 서약의 표시'로 일제히 단발을 단행, 전국으로 20여만명이 단발

1904.12.02. (통합)일진회 결성, 일진회와 진보회가 통합하여 일진회를 결성하고 친일과 반정부를 표방, 이용구는 13도 총회장으로 취임

진보회장 이용구와 일진회장 송병준(왼쪽)<월간조선>

1905.05.29.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틱함대에 대승

1905.06.10. 일진회 북진수송대 조직(~10.20)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위해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철도부설 등에 동학교도 총 11만 4,500여명을 동원

1905.07.29.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미국이 러일전쟁 중재, 일본과 미국은 필리핀과 조선의 식민지 통치를 상호 인정

1905.09.05. 포츠머스조약 체결, 루스벨트 미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

1905.11.06. 일진회 선언서 발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

1905.11.17.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조선 황실의 안녕과 존엄 유지 보증, 한성에 한국통감부 설치

1905.12.01.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출교 처분

1905.12.22. 일진회 총회에서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회장 송병준 선출

1907.05.22. 이완용 내각 출범, 일진회의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

1907.07.20. 고종황제(高宗皇帝) 양위식 거행, 일본의 압박에 순종에게 양위, 양위식은 두명의 내관들이 대신 함

1907.07.31. 대한제국 군대 해산, 순종 황제가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림

1908.06.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의병에게 죽은 지방 일진회원은 9,260명

1908.08.21. 일진회와 대립한 계몽운동단체 자강회 해산

1908.12. 이용구 집에서 일진회 원호대(조선일보)

1909.09.01. 일본군 남한 대토벌 작전(~10.30) 군대해산 후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 전국적 의병투쟁 전개(약 4만명), 일제는 대대적으로 무력 진압 실시

1909.11.04.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날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이 추도회 개최

1909.12.04. 일진회 이용구, 하방상주문-청원서 제출, "한민족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한일양국의 합방을 주장"

1910.08.22. 한일병합조약 체결, 대한제국 멸망, 일본 제국의 한국식민지, 李完用과 통감 寺內

1910.09.01. 헌병 경찰 제도 창설, 2만 여 명 헌병 경찰을 한반도 전역에 배치

1910.09.12.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된 직후 일진회를 해산

1910.09.25. 조선총독부, 일진회 해산명령, 이용구는 일본으로 도주

▼__출처__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연표

@국사편찬위원회 | 제2차 동학농민전쟁